<역사를 알면 더 재밌는 국내 여행기>
경주는 어렸을 때 수학여행으로 꼭 한두번은 다녀온 곳이라 성인이 되었을 때 막상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선뜻 떠올리게 되는 곳은 아니었다. 누구나 “경주”하면 알고 있는 불국사, 석굴암 등 그 유명한 역사 기행을 해야만 하는 곳으로 생각하면 더 머리가 아파온다. 여행은 머리 식히러 가는건데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니, pass!
박물관보다 핫플레이스가 더 좋은 역사 전공자
그런데 여행이란건 원래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닌가. 보고 싶지 않은건 보고 싶지 않은대로 마음 끌리는 대로 나만의 색깔이 담긴 여행이라면 그 어떤 여행도 의미 없을 수 없다. 심지어 역사를 전공해 역사로 먹고사는 내게도 박물관보다, 탑 구경보다 황리단길 투어가 더 좋은건 어쩔 수 없다.
꼭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역사 유적지를 가지 않아도 식도락으로 역사를 느낄 수 있고, 핫플레이스에 가서 경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신라 시대 그 당시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역사 이야기가 담긴 여행이 되지 않을까.
첨성대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구경하는 첨성대 풍경
경주에 가면 신라 시대의 많은 역사 유적을 볼 수 있지만 그 중 사람들이 흔하게 지나가며 많이 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첨성대이다. 첨성대에서부터 핫플레이스가 몰려 있는 황리단길까지 찬찬히 걸어오는 길이 좋기도 하고, 특히 봄에는 첨성대 주변의 유채꽃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5월 쯤, 경주에 놀러갔을 때 유채꽃 풍경을 기대하고 갔다가 아무리 찾아도 유채꽃이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하루 전날 다 베어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세워진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첨성대의 석재 개수가 1년을 뜻하는 365개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하다. 시간에 따라 무료로 설명해주는 첨성대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더 좋고, 그냥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시간에 따라 다른 첨성대의 풍경을 즐겨보는 것도 좋다.
사람은 감감적인 동물이라 직접 먹고 만지며 느낀 것은 어쩌면 더 기억하기 쉽다. 그래서 훗날 첨성대가 어떤 곳이었지는지는 머릿 속으로 외우기는 어려워도 내가 그 당시에 먹은 첨성대 모양의 아이스크림만큼은 어떤 맛이었는지, '첨성대'하면 그 첨성대 모양의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 정도의 추억은 오래 기억에 머무를지 모른다. 첨성대 근처에 있는 조그만 가게, "리초야"에서는 "말차 먹은 첨성대"라는 음료를 시그니처로 팔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면 돌하르방 모양의 귤빵을 팔고, 진주에 가면 유등 모양의 빵을 파는 것과 같은 이치지만 그래도 첨성대 모양의 쿠키가 꽂혀있는 말차라떼의 모습은 귀여웠다. 이렇게 첨성대 모양의 음료를 마시며 첨성대가 어떤 곳인지 한번 더 보게 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경주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이 가게 앞의 풍경은 분주했다. 첨성대 모양의 쿠키 음료를 들고 첨성대를 배경으로 인증샷 남기는 것이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음료 가게와 첨성대의 거리는 걷기엔 거리가 꽤 되서 빨리 걸어가서 찍지 않으면 그 사이에 말차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가장 좋은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첨성대 모양의 음료를 사들고 먹으며 천천히 첨성대까지 걸어가 구경하는 것, 이것을 추천하고 싶다.
경주의 포토존은 대릉원,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경주에는 풍경 좋은 곳이 워낙 많지만 흔히 사람들 사이에 알려진 경주의 포토존은 대릉원이다. 경주에 있는 경북산림환경연구원도 너무 좋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닷가의 풍경도 좋았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사람들에게 경주의 필수코스이자, 꼭 가야할 포토존은 대릉원, 딱 한 곳으로 정해져버린게 아쉬운 마음이다. 그래도 이곳이 정말 옛 조상들의 고분이란 곳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대릉원의 풍경은 사계절 내내 아름답다. 대릉원은 신라 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 23기 고분들이 평지에 모여있는곳으로 많이 들어본법한 천마총과 미추왕릉, 가장 크기가 큰 황남대총 등이 있는 곳이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씌여진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란 구절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SNS에 "대릉원 포토존 가는 법". "대릉원 포토존 위치"가 유행할 정도로 오로지 그곳에서 사진을 찍기에 급급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 하지 않았는가. 그곳만을 향해 앞질러가기보다는 대릉원 입구에서 처음 볼 수 있는 미추왕릉부터 하나하나 둘러보며 적어도 대릉원에 어떤 능이 있는지 정도는 훑으며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찬찬히 산책하며 걷다보면 사람들에게 유명한 그 대릉원 포토존보다 더 좋은 느낌있는 나만의 스팟, 나만의 포토존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황남대총이 연못에 비치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웠 기억이 난다.
골품제 등급에 따라 식사 가격이 달라진다구요?
예전에 친구가 경주 여행을 가더니 내게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한정식을 먹다 찍은 사진이었는데 '진골 셋트'란다. "뭐라구? 진골 셋트? 그럼 성골도 있고 6두품도 메뉴에 있어?"라고 물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신라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도였던 골품제가 있던 사회이다. 골품의 등급에 따라 관직은 물론 혼인, 집의 규모, 의복 색깔, 마차의 장식 등 일상생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제도이다. 이런 신라의 제도에서 따와 메뉴로 '이사금', '진골', '성골' 등의 셋트를 만들어 이름 붙여놓은게 재밌으면서도 평등한 현대사회에서 성골 셋트를 먹으려면 진골 셋트 먹을 때보다 비싼 돈을 내야 하고 음식 구성도 달라진다하니 '내 돈 형편으로는 진골 셋트겠군' 하며 씁쓸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해 한번쯤 관심 갖게 하는 이 식당의 아이디어가 기발하기도 했다.
"라선재"라는 이 식당은 지금은 신라 전통음식을 체험해보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당시 신라 왕실 음식에 대해 설명도 듣고, 빡빡장, 밤나물밥 등과 같은 신라 전통음식 만들기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곳이라 신라 그 당시 생활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경주에서만 해볼 수 있는 이색체험이 아닐까 싶다. 요즘 요리 클래스가 유행하면서 일일클래스로도 많이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베트남에 가도 베트남 쿠킹클래스가 인기인 것처럼 돈 주고 사먹는 것만 하기보다는 직접 만든 전통음식 먹는 체험이야말로 제대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역사공부가 아닐까.
바다 뷰, 마운틴 뷰 말고 능 뷰를 보며 먹는 피맥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아마 바다 뷰, 마운틴 뷰일 것이다. 바다 전망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운틴 뷰에서의 차 한 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진다. 나이가 한 살 더 먹어갈수록 바다 전망도 좋지만 초록초록한 기운을 주는 마운틴 뷰의 공간이 더 좋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경주에서는 바다 뷰, 마운틴 뷰가 아닌 능 뷰를 보며 피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987 pizza" 란 가게 테라스에는 바로 앞에 고분들이 있어 능 뷰를 보며 피자를 먹을 수 있다. 뭔가 우리의 조상이 묻혀진 능 앞에서 피맥을 하는 것이 죄송스럽고 불편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왕 경주에 왔다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능 뷰를 마구마구 즐기며 피자도 먹고 커피도 한 잔 해보는걸 추천한다. 특히 이곳이 인기 가게라 웨이팅이 꽤 있을 수도 있다. 그럴땐 대기명단에 이름을 적어놓고 근처에 있는 분황사 석탑 한 바퀴 구경하고 오는 것도 좋다. 웨이팅이 한참 길어 기다릴까 말까 고민하던 때에 근처에 있던 분황사 석탑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딱 내 차례였던 기가 막힌 그 찰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선덕여왕 에일? 김유신 에일? 수제맥주와 함께하는 경주의 밤
몇 년 전, 경주 여행을 왔을 때 밤에 맥주 한 잔 하려고 막상 맥주집을 찾을 때만 해도 마땅한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경주의 느낌을 살린 한옥 공간에서 마실 수 있는 맥주집이 늘어나며 인기이다. 하지만 한옥 공간의 맥주집은 꼭 경주 아니여도 많지 않은가. 나는 저녁을 먹으러 갔던 "경주피자"란 피자집에서 피자와 함께 마셨던 이곳에서 직접 만든 수제맥주가 기억에 남는다. 수제맥주의 종류가 여러가지인데 맥주를 좋아하는 내게 맛도 좋았지만 맥주들의 이름이 재미있다. "선덕여왕 에일", "불국사 에일". "첨성대 에일". "김유신 에일" 등 이런 식이다. 경주에 오면 떠오르는 인물이나 유적의 이름을 따서 만든 맥주 이름, 어떤 맥주를 마실까 고르는 재미도 있고, 병이 꽤 무겁긴 하지만 경주에서 사올 수 있는 흔하지 않은 선물로도 좋다.
신라 왕족의 연회장이던 안압지, 지금은 연인들의 성지
경주의 '야경'하면 꼭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안압지이다. 그만큼 야경이 너무 멋진 곳이라 이곳을 가려면 표를 끊는 줄이 너무 길어 한참 기다려야 하거나 사람들 많은 틈에서 구경을 해야하니 조금 서둘러 가길 추천한다. 삼국시대 최대 인공연못이었던 경주 동궁과 월지는 물 위로 떠다니는 기러기와 오리떼들을 보고 '안압지'로 불리던 곳이다. 그 당시엔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접견장이자 신라 왕족들이 즐기던 연회장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당시엔 왕족들의 연회장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손꼽힌다. 연못에 비치는 노란 불빛에 황금색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는 풍경은 연인들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에 바쁘고, 밤이라 어두우니 손 잡고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어쩌면 그 당시 연회장과는 다르지만 이곳에 오면 흥이 느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 당시와 비슷하지 않을까. 연인이 아니여도 경주에 오게 된다면 이곳의 야경만큼은 꼭 마음속에 담아가길 추천하고 싶다.
이제 경주는 어렸을 때 필수코스로 가던 수학여행지도, 반드시 역사기행을 하러 가는, 역사 좋아하는 사람들만 가야하는 곳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곳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그 유명한 불국사 한 곳 가지 않아도, 신라 시대의 역사 향기를 충분히 느끼고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