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를 고르는 즐거움 또는 괴로움(1)
아주 오랜만에 통장에 잔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매달 조금씩 불어 가는 숫자들을 보며 내가 결심한 건... 여행이다. 그것도 조금 긴 한 달 살기.
아이들이 어렸을 땐 여유가 없었다. 시간, 돈, 마음의 여유.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얻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조금씩 내가 누릴 수 있는 시간, 돈, 그리고 '이젠 뭐든 살살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다. 그러고 나니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집을 사는 것도, 땅을 사는 것도 아닌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곧장 은행으로 가서 매달 백만 원, 12개월 만기인 적금통장을 만들었다.
대학시절 첫 해외여행을 유럽 배낭여행(그렇다, 배낭여행이란 말이 유행하던 때에 대학을 다녔다)으로 시작했다. 그 후 기회가 될 때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그 기회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름의 여행을 시도하고 즐겼다. 하지만 여행을 마칠 때쯤엔 '역시 한국이 최고야!'라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늘 들었던 것 같다. 뭐든 빠릿빠릿하고 말 통하는 내 나라가 최고지!
스물여섯, 미국과 태국에서 일 년 반을 보내고 왔다. 그때 낯선 곳에서 살아보기의 매력에 퐁당 빠져버렸다. 더불어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운 것투성이다. 아, 좀 더 시간을 내어 많이 돌아다일 걸... 아, 좀 더 부지런을 떨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볼걸...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자박자박 걸어 단돈 0.99짜리인 그날의 커피를 텀블러 하나 가득 따라 나처럼 이른 아침 눈이 떠졌지만 할 일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카페의 작은 공간을 공유했던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아침 풍경. 대학가의 카페, 서점, 꽃집, 피자가게, 바 등을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던 순간에 남겨진 건강하고 거침없던 앳된 이십 대의 나를 볼 때마다 그날의 공기, 소리, 냄새가 아련히 떠오른다.
사람들로 빼곡한 관광 스폿을 돌아다닌 것보다 사소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니 나는 긴 여행에 더욱 끌리는 사람인 것 같다. 여유를 좀 부리면서 사람, 풍경, 냄새 등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추억이 되는 것이라 믿는 사람.
한 달 살기를 꿈꾸자 가장 먼저 런던이 머릿속에서 퐁 튀어나왔다. 런던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유럽 여행의 제일 마지막 루트로 선택된 도시였기에 그때의 나는 피곤에 잔뜩 찌든 상태였다. 여기에 그 유명한 런던의 날씨(비 오고 흐리고 춥고... 3박자의 콜라보)가 더해져 며칠 묵었던 기억이 그때의 날씨처럼 흐릿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런던은 이렇게 기억되서는 안 될 멋진 도시다. 지루할 틈이 없이 돌아다닐 곳이 많으며, 우리에게 친근한 영국 여왕(아, 얼마 전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아쉽다. 왠지 말이다)과 더불어 근사한 왕실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무료로 세계 최고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맘껏 다닐 수 있고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손흥민 선수와 해리포터(나의 꿈은 한국의 '조앤 롤링', 맞다. 덕후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러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도시가 바로 런던인데... 문제는 돈이다. 무시무시한 영국의 물가를 에어비엔비를 통해 검색할 때마다 체감하곤 한다. 런던 중심가도 아닌데 아이 둘과 지낼 숙박비가 28일 기준 400만 원을 웃돈다. 한 달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숙박비로 고스란히 털어 넣어야 한다. 선뜻 결제 버튼이 눌릴 리가 없다. 나의 예산은 백만 원씩 12개월이 만기인 적금 통장이다. 항공료와 숙박비로 예산의 절반 이상을 써야 한다. 모자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유럽여행 카페에 질문글을 올렸다. 달린 댓글들은 무시무시했다.
- 식사를 만들어 드신 다면 충분할 듯, 근데 숙소 컨디션이 엉망일 듯요
- 그 예산으론 좋은 숙소는 어렵고 근교 여행 다니기에도 부족할 것 같음
- 4인 가족, 4개국 한 달 보내는데 3천 들었어요. 천 오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부족해 보입니다. 지금 예산에서 곱하기 2 하세요.
아... 런던이 멀어진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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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런던에 갈 수 있을까요?
다음 글을 제 2의 후보지 입니다 :)
자, 여러분의 추천 여행지를 기대해 볼께요
by. Mon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