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모 0년 차, 어른 3년 차
"나랑 같이 살래?"
이처럼 스윗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싶겠지만, 사실 나는 그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니까 타인과 동거를 한다는 것 말이다.
어릴 때에야 친구와 같이 살고 싶었지, 어른 3년 차쯤 되자 타인과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빅데이터를 돌이켜보건대 나는 확신의 내향인이었다. 밖에서 에너지가 방전되었다가도 집으로 들어가 혼자 있으면 에너지가 다시 차올라서 새벽 내내 게임을 했다. 그런 내게 자취방이란, 밖에서 쓰고 다니던 가면을 집어던지고 맘껏 노래도 부르고 방귀도 뿡뿡 뀔 수 있는 그런 자유의 들판 같은 곳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내게 동거를 제안했을 때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혼자 있는 거 좋아해. 각 방 쓰면서 서로 터치 안 하면 되지."
그 친구는 이제 문제가 해결된 것 아니냐며 나를 바라봤다. 참고로 그 친구는 외향형 인간이다. 아, 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할까.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없어. 나는 자취방에서는 오롯이 혼자 있어야만 해. 같이 살다 간 언젠가 내 인내심이 한계치에 도달할 테고 우리 둘의 사이는 영영 되돌아올 수 없는 스틱스강을 건너게 될지도 몰라.
결론적으로 친구는 내 입장을 납득할 수는 없어도 이해해주기는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그 동거 이벤트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 친구와는 말이다.
내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친동생이 대학교에 입학했단다. 걔가? 벌써? 생각해 보니 그럴만한 나이가 되었다. 그 말인 즉, 이제 동생과 함께 살만한 자취방을 구해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그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월세를 내고 있는 빈궁한 대학생으로서 어쩔 도리가 없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한 배에서 난, '같은 핏줄'의 두 여자. 분명 비슷한 DNA를 물려받았을 텐데도 동생과 나는 왜 이렇게 성격이 다를까? 아마 이 자연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어떤 자연재해가 닥치더라도 최소한 단 하나의 유전형질만큼은 생존시키기 위해 극도로 분화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즉흥형에다 감정형인 나와는 달리 동생은 철저한 계획형에 사고형 인간이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을 하자고 해도, 지금은 낮잠 자는 시간으로 계획되어 있다며 거절하는 동생을 내가 이해할 수 없듯이, 식당 하나를 예약하는 데에도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상태를 고려해야만 하는 나를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 물론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했고 웃음 코드도 같았다. 옷 취향도 같아서 내가 동생의 옷을 말도 없이 빌려 입었다가 된통 혼난 적도 있었다. 그렇다. 동생에게 혼나는 언니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우리가 갑자기 함께 자취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20년간 같이 살긴 했지만 이건 좀 달랐다. 같은 집에서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이상, 우리는 이제 팀플이라는 것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주는 것 말고는 팀플이라 할만한 것을 해본 적 없는 이 녀석과 과연 자취라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나는 그런 동생과의 동거가 싫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조금 기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동생이란 존재는, 말하자면 '만만한 타인'이 아니던가.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언니자식'정도로만 퉁치고 넘어가줄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 동생이라는 존재는 내 자유에 타격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살면서 줄곧 느껴야만 했던 묘한 외로움을 타파해 줄 그런 재미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동생도 나처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와는 달리 외로움을 타지 않는 녀석이라는 것을. 심지어는 동생의 방은 늘 깔끔했지만 내 방은 늘 더러웠다. 이쯤 되면 외로운 언니와 동거하게 된 깔끔쟁이 동생의 입장을 예측할 수 있으리라.
엄마와 아빠를 대동해서 동생과 내가 살만한 집을 보러 갔던 날이었다. 엄마가 고심해서 고른 곳들 중, 꽤 괜찮은 원룸을 확인했다. 원룸이지만 좁지는 않아서 둘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나름 만족하며 자취방을 나왔는데 동생의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하며 입을 삐죽 내미는 모양새가 터지기 3초 전의 폭탄 같았달까. 결국 동생이 내뱉은 말은 이런 거였다.
"내가 언니랑 한 방에서 지내야 돼!?"
자기가 손해 본다는 식의 말투. 그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 담긴 동생의 말이 어찌나 괘씸하던지,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내가 그랬으니 기껏 집을 다 찾아놓은 엄마는 또 오죽했을까.
"그럼 너네가 알아서 해라!"
결국 엄마의 그 말을 끝으로 그날의 자취방 찾기는 막을 내렸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본격적으로 집을 구하러 다니게 된 것이다.
사실 나로서도 부모님 없이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집'이라는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일을, 내가 만져본 적도 없는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제시하면서 '부동산 중개인'이라는 어른을 만나 '계약을 성사'시켜야 하다니. 과연 초짜배기 어른인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난생처음 혼자 서울에 올라갔을 때가 떠오른다. 서울 소재의 대학교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행사가 열렸을 때였다. 난 처음으로 서울 지하철을 혼자서 타봤다. 그전까지는 친구들과 서울 투어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던 게 다였던 것이다. 그날은 길을 잃지 않으려고 굉장히 긴장했다. 겨드랑이에는 접이식 우산을 낀 채였다. 왜 속담 중에서 '서울은 눈 뜨고 코베이는 곳'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언제든지 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검사처럼, 누가 해코지라도 할라 치면 바로 우산을 꺼내 들어 휘두를 작정이었다. 중학생의 손맛이 매워봤자 얼마나 매웠겠느냐만은 그날의 각오는 제법 비장했더랬다.
동생과 집을 보러 갔던 때의 내 각오도 그에 못지않았다. 언니인 데다가 서울살이 선배라는 타이틀을 걸고 척척 부동산으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에는 어떤 결의가 섞여 있었다. 부모님께 우리가 충분히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었다. 어른 대 어른으로서 부동산업자를 만나 좋은 입지의 자취방을 찾을 수만 있다면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본가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조건은 각자의 사생활이 보장될 수 있는 투룸. 비용은 이 정도. 핸드폰에 미리 메모해 두었던, '집을 볼 때 꼭 고려해야 할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절대 얕보이지 말아야지. 꼼꼼하고 능숙한 어른으로 보일 테야. 뭐 그런 생각으로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 부동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부동산 중개인은 덩치가 있는 아저씨였다. 목소리에 힘을 주어 집을 보러 왔다고 말하는 나와는 달리 그 아저씨는 낮잠이라도 자다 일어난 것처럼 영 나른해 보였다. 이미 전화통화로 얘기했던 내용을 다시 짚어주며 이래저래 조건을 말하자 그 아저씨는 차를 타고 집을 보러 가자고 했다. 순간 범죄 뉴스가 생각나면서 그 차를 타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내가 누구인가. 언니이자 서울살이 선배이자 어른이 아니던가. 그래서 짐짓 능숙한 척 차를 탔더랬다.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부동산 아저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겨우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비탈길에 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리니 웬 언덕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여기서 이제 걸어 올라갈 거예요."
걸어 올라가라니. 나는 차에서 내려 언덕을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겨우 오를만한 계단이 있었다. 높낮이도 제각각인, 시멘트로 만든 계단이었다. 우리가 볼 집이 그 위에 있다는 사실에 좀 당황했지만 애써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미 이런 집들은 많이 봐왔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고 싶었다.
그렇게 계단을 올라 비좁은 골목을 몇 번 더 꺾어서야 나온 첫 번째 집. 낮고 어두침침한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축축한 물냄새와 먼지 냄새가 났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서 있을 정도의 좁다란 복도를 기준으로 낡은 나무 문짝 세 개가 있었다. 방이 세 개나 되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문짝 하나당 가구 하나씩이 살고 있는 거였다. 우리가 보려고 하는 집은 그 짧은 복도 끝에 위치한 문짝이었는데, 문짝을 열었더니 우리 집과 90도 각도로 위치해 있던 다른 집 문짝이 아예 가려졌다. 아니 그럼 이웃 주민이 문을 열면 다른 집 주민은 영락없이 집 안에 갇혀 있는 꼴이 되는 것일까? 대체 누가 이런 식의 건물을 설계한 거지?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부가 어쨌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내가 준비해 왔던 '집을 볼 때 꼭 고려해야 할 리스트'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두 번째로 봤던 집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컨테이너박스를 개조한 듯한 외관에 견고해 보이지 않는 현관문이 달려 있었는데 문고리도 도어록이 아닌 열쇠로 잠겨 있었다. 철컥, 부동산 아저씨가 열쇠를 돌리자 문이 열렸고 곧바로 부엌 겸 거실이 나왔다. 집 자체는 넓어 보였다. 최근에 새로 리모델링을 했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처럼 꽤 깨끗해 보이긴 했다. 그전에 봤던 집이 아무래도 너무 별로였던지라 이 정도만 해도 둘러볼 가치가 있었달까. '집을 볼 때 꼭 고려해야 할 리스트'대로 수도도 틀어보고 벽도 체크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일러 패드가 보이지 않았다. 부동산 아저씨도 당황했는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방 문 뒤에 붙어 있던 보일러패드를 겨우 찾아냈다. 반쯤 파여 있는 콘크리트 벽에, 그것도 전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그 보일러패드는 조작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동산 아저씨도 그걸 보고 순간 말이 없었다.
"... 이거 집주인한테 얘기해서 고쳐달라고 할 거예요. 작동은 다 됩니다."
"아, 예..."
나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신발장에는 아직 콘크리트 덩이들이 돌아다니고 이었다. 아직 짓다 만 줄 알았다.
그 후로도 그와 비슷한 느낌의 집을 보러 갔다. 집을 구경하는 내내 동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내 뒤만 따라올 뿐이었다. 심지어 가뜩이나 나른해 보이던 부동산 아저씨도 점점 더 의욕을 잃고 있는 듯했다. 이 어린 여자 애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 계약은 글렀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어... 이제 다 본 건가요?"
부동산 아저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는 최대한의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정말 이게 다인 거냐는 뜻이었다. 부동산 아저씨는 지금 제시한 금액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어봤다.
"오피스텔은 없는 거죠?"
"에이. 오피스텔은 훨씬 더 뛰죠."
오피스텔의 조건을 듣고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제시했던 조건의 오차범위 내에도 들어가지 않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내가 준비했던 리스트나 부동산 업자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한 마인드 컨트롤 같은 것도 다 소용이 없었다. 서울의 살만한 집들은 모두 우리의 예상보다 한참 더 비쌌으니까. 어른 행세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러니 당장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방은 그것들 뿐이었다.
그렇게 그 중개인과는 소득 없이 헤어졌다. 성과도 없었는데 금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터벅터벅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동생이 살짝 울먹이듯이 했던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돈 보탤 테니까 더 좋은 곳으로 찾아보면 안 돼?"
그 말이 어찌나 웃기던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생은 과연 자신이 얼마 정도의 돈을 더 보태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국 우리는 그날 부동산 찾기에 대패하고 말았다. 우리가 얼마나 세상물정을 모르고 있었는지만 여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에는 엄마와 함께 두세 번 더 집을 보러 다닌 끝에야 결국 원래의 기준보다 더 높은 전월세 가격으로 빌라 투룸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집에도 큰 문제가 있긴 했다. 그 사실을 이사를 간 후에야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당시 우리에겐 그 정도의 집을 구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사실 부모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애초에 나와 동생 둘 다 자취라는 것을 꿈꿀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자취라는 것 자체가 우리 둘이 감당할 수 없는 독립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내게 동거를 제안했던 그 친구는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자취를 했었다. 아르바이트 두 개를 겸해서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는 학교 근처 반지하에서 자취를 하기도 했고 아주 잠깐 동안은 고시원에서 살기도 했다. 그 고시원은 꼭 피아노 학원 같았다. 신발을 벗고 기다란 복도로 들어가면 양 옆으로 피아노실 같은 고시원방들이 있었다. 방에 들어가면 침대와 책상, 샤워부스와 변기가 빈 공간 없이 들어차 있었다. 침대 위에는 빨랫대가 있어서 침대에 누우면 코앞에 젖은 빨래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결국 그 친구도 한 달 만에 그 집을 나오긴 했지만 그 친구야말로 오로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계약도 하고 월세도 내고 했으니 제대로 된 독립이라는 것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그 친구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면서 마음 맞는 룸메이트와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있다.
또 다른 내 친구는 나처럼 부모님의 지원으로 월세를 냈다. 하지만 그 친구도 곰팡이가 피는 집에서 살았다. 집주인이 벽지와 장판을 새로 해준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벽지에 곰팡이가 폈다고 했다. 아마 건설 단계에서부터 결로를 제대로 잡지 못한 건물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벽지를 새로 발라도 곰팡이가 계속 생겼던 탓에 결국 그 벽은 이사를 갈 때까지도 벽지를 완전히 제거한 헐벗은 상태로 방치되어야만 했다. 그 친구는 그 집에서 2년을 꽉 채워 산 다음에야 이사를 갈 수 있었다.
어른으로서 독립을 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인 자취. 자가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월세나 전세를 구하는 것인데도 참 어렵다. 이 시기로부터 몇 년 뒤에는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렸고, 내 주변에서도 몇몇 피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LH 공공임대주택을 알아보던 때 봤던, 그 많은 임대주택들도 대부분 전세사기로 경매에 나온 물건들이었으니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가 피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그 물건들이 또다시 누군가에게 비교적 싼 값으로 서울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생각해 보면 참 숨 막이는 일이다.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집을 구할 수 있어서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전 집에서는 집주인의 요구로 전입신고가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전입신고도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내 주소지가 서울이 되었다. 내가 세대주, 동생이 세대원이었다. 비록 동생은 나를 어른이라든가 대표라든가 인생 선배로서 인정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법적인 문서에는 누가 뭐래도 내가 세대주였다. K 장녀로서의 어쩔 수 없는 책임감과 더불어 나는 왠지 한층 더 어른 행세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땐 그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