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돌 Apr 17. 2024

【내 생에 삼식이는 어렵겠는데】

   

  “와 오늘은 진짜 밥하기 싫은데.”

  “아들, 그냥 김밥이나 사다가 먹을까?”     


  계란 두 알로 아침밥을 대신하고 7시 30분에 학교로 길을 나선다. 하루 종일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을 위해 교수님들의 시연을 보고 또 실습을 한다. 퇴직 후 꽤 오랜 시간 책보고, 글 쓰고, 그림 그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에 감사하고 즐거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의 일과가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요즘 조리대 앞에서 실습을 할 때면 왼쪽 무릎에 보호대를 찬다. 인지하지 못하지만 왼쪽 다리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것 같다. 이것은 과거 강의 시 학습자들과 교감을 위해 집중할 때 생기는 약간의 공격적 자세인데, 칼질하고 요리할 때도 그런가 보다. 조금 다른 것은 강의 할 때는 그래도 조금씩 걷고 움직이지만 조리대 앞에서는 한 자세로 그냥 서 있는 것이 무릎에 무리를 주었나 보다. 물론 나이를 더 먹기도 했지만 말이다.    

  

  보통의 남자들이 퇴사 후 삼식이(하루 세 끼를 아내가 다 준비해줘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내가 아직 직장에 나가는 관계로 아침 계란 두 알을 제외하면 거의 내가 밥을 해결한다. 그런데 요즘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이 조금씩 버겁게 느껴진다. 이유는 이미 학교에서 최소한 세 가지의 생소한 음식을 만들고 또 다량의 설거지를 했기 때문에 그만큼 음식을 만들어 내는 열정과 에너지가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완전 녹초는 아니지만 꽤 지쳐서 집에 오게 되는데 그 상태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서야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어쩌면 주부들이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챙기는 일은 대단한 인류애임을 경험으로 알게 되니 나도 삼식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 같다. 집에 왔을 때 아들의 점심 먹고 나간 흔적이 싱크대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 몹시 짜증이 난다. 과거 내가 먹은 라면 그릇을 보고 밤늦게 귀가한 엄마가 짜증내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 순간 나도 체념한다. 결국 남아 있는 설거지는 내 몫이고 나는 어김없이 다시 싱크대 앞에서 주방세제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쉰다.     


  늦은 저녁 내 손끝에서 작은 살집이 벗겨질 때는 이게 주부습진인가 싶기도 하다. 손에 고무장갑이 불편해서 맨손으로 설거지 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매일 한 시간 간격으로 세제, 비누, 물에 노출되는 손이 성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5시 남부순환로에서의 내 머리 속은 저녁 메뉴로 고민하고 있으니 반쯤은 전업주부임이 확실하다.      


  이제는 슬슬 잔머리를 굴린다. 김밥 두 줄에 라면이면 세 식구 저녁 해결인데 하면서 김밥을 사갈까? 아니면 매일 악마의 손길로 유혹하는 ‘쿠팡이츠’의 무료배달 쿠폰을 사용해볼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나는 배달음식을 싫어하잖아!’ 하며 다시 주방 조리대에서 도마와 칼을 꺼내 준비한다. 아마 내 생에 삼식이는 어려운 팔자인 듯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격증으로 주부 9단 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