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랑과 죽음. 어쩌면 짧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무거운 주제가 아닐까.
날 얼마나 사랑해? 죽도록 사랑해? 날 사랑하는 걸 증명할 수 있니? 내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까? 너 없는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너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 화두와 관련한 질문과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리라. 살며 사랑하다 결국 홀로 남아 외로움을 견디다 나도 죽는 것, 삶이 이렇게 단순한 것일까. 단순한 한 문장이나, 우리는 그 문장 속 '사랑' 하나에 천국도 지옥도 넘나들고, 그 문장 속 '죽음'에 좌절과 공포를경험한다.
작가 최진영은 이런 사랑과 죽음 이후의 서사를 두 인물의 시점(페이지 위 표시● :남자 구의 시점/ ○: 여자 담의 시점)을 오가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담담히 풀어간다.
사랑하는 구가 길거리에서 죽었고, 담은 그를 술 취한 사람인 척 택시를 타고 집에 데려와 씻기고 닦으며 같이 지낸다. 빠지는 머리카락이며 자른 손톱과 발톱은 물론 그의 살점까지 담은 다 먹어버린다.
그의 시신을 먹는 행위는 결코 호러도 스릴러도 아닌, 그저 사랑하는 이와 죽음으로 헤어질 수 없는 연인의, 하나가 되고자 선택한 방법이었다. 도덕적 잣대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저 소설적 상상으로 연인 사이에 사랑의 마지막 행위라 여겼다. 잘 살기 이전에 그저 평범하게 살고자 했으나 짓밟히고 짓이겨진 구의 삶에 죽어서라도 그 누구에게도 손대게 하고 싶지 않은, 살아남은 여인의 선택이었다. 무서움보다는 안타까움에, 안쓰러움에 먹먹해진다.
많지 않은 분량과 쪽수당 적은 글자수와 평이하면서도 휘몰아치는 문제에 금방 읽고 마는책이다. 단, 읽고나서 여운이 더 긴 소설이다.
내가 죽으면 어떡할래?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살아 남ㅁ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 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P 20
그 누구도 몰라야한다. 어차피 관심 없지 않았는가. 사람으로서 살아내려 할 때에는 물건 취급하지 않았는가. 그의 시간과 목숨에 값을 매기지 않았는가. 쉽게 쓰고 버리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 받던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땅에 묻을 수도 불에 태울 수도 없다. 구는 여기 내 눈 앞에 있다. -P39~40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텐데. 이 마음도 네가 먹어주면 좋을 텐데. 나도 안다. 맑고도 우스웠던 우리의 첫키스와 그 겨울밤을 떠올리던 또 다른 밤도 나는 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ㅎ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P68
함께 하던 어느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있고 질펀한 감정 한 방우링 뚝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ㅇ녀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자란 부분까지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 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P88
나도 모르지 않은 말, 알지만 아는 척하기 싫은 말, 돈이면 다 된다는 그런 뻔한 말, 뻔해서 아픈 말....누나의 말을 듣다보면 나는 등신 병신 천치 같았다. 돈도 이기심도 꿈도 없으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낙오자 같았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누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잘되라는 소리가 아니라 나가 죽으라는 소리로 들렸다. 내겐 가망이 없다는 말로 들렸다. 걱정이 담긴 충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내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타인의 말을 구기거나 접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 그렇게 싸우고 욕을 하고 뛰쳐나갔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누나와 한 냄비에 각자의 숟가락을 집어넣으며 빨간 찌개를 퍼먹었다. -P110
몸뚱이....몸은 인격이 아니다. 사람이라느 ㄴ고기, 사람이라는 물건, 사람이라는 도구.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영혼 값은 달랐다. 돈 없는 자의 영혼을 깎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없으므로 깎이고 깎인 그것을 채우기 위해 매달리고, 매달리다 보면 더욱 깎이고....뭔가 이상하지만, 그랬다. -P152
나는 내가, 너를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되잔아. 앞으로도 쭉 안될 것 같잖아. 구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구의 눈동자는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네가 있든 없든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P159
만약 네가 먼자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않고 살 수 있으을거야. 나를 먹을 거라는 그 말이 전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다. 네가 나를 죽여주면 좋겠어. 병들어 죽거나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네 손에 죽는 게 훨씬 좋을거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 모로 누워 팔과 다리와 가슴으로 상대를 옭매었다. -P165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P175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런 희망 없이 살면서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P176
지난 날, 애인과 같이 있을 때면 그의 살을 손가락으로 뚝뚝 뜯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 상상을 하다 혼자 좋아 웃곤 했다. 상상 속 애인의 살은 찹살떡처럼 쫄깃하고 달았다. 그런 사랑을 가능케 하는 상상,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종종 돌아봤다. -작가의 말 중,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