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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담 Nov 20. 2024

[독서후기]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김영현/실천문학사

-우울한 시대의 불꽃 같은 이야기

  에드워드 카의 명언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이다."를 상기해 보더라도 역사는 결국 현재의 삶이 누적된 과거로 지금도 역사는 진행 중이며, 우리는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이다. 제대로 정산되고 평가되지 못한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또한 현재의 삶이 결국 미래의 인과가 되어 새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다. 누구는 과거 역사의 왜곡된 평가로 현재까지 뼈아프게 견뎌야만 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여전히 잘못된 질타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회에 제대로 소속되지 못한 채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회는 결국 오점의 역사가 되풀이된 것이며, 건강하지 못한 국가일 뿐이다.


 인류 문명은 점점 편리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나, 과연 문화를 포함한 인류 제반 역사는 바르게 가고 있을까. 거듭되는 시행착오들과 이를 바르게 이끌어 가려는 정의롭고 올곧은 이들의 노고만큼 잘 가고 있다고 믿어도 될까. 의문이다.


 갈수록 역사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학생들을 보며 그 안타까움은 교사로서보다는 기성세대로서의 우려이자 반성이었다. 그나마 한국사가 필수 과목으로 정착된 것은 다행이라 여긴다. 입시라는 명목이더라도 학습을 해야 한다고 믿기에. 학습 중에라도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지니기를 바라기에. 역사를 소재로 한 수많은 문학, 영화나 드라마가 때론 왜곡되기도 하고 잘못된 역사적 지식을 전하기도 하나 그럼에도 역사를 외면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는 한 방도인 것 또한 사실이다.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비극적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작은 기회라도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작가의 소설 속에서 재조명된 암울한 역사를 제대로 읽어내는 독자가 늘어남은 희소식 중 희소식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역사를 어떻게 정립하고,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는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역사라도 그저 잊어져도 되는 역사는 없으며, 왜곡되도록 방치해도 되는 역사는 없다. 과거의 인과로 만들어진 오늘이 결국은 미래 역사의 인과일지니, 옳은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작가들만의 소명을 아닐 것이다. 보아주는 이 없는 예술적 재현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질풍노도의 역사적 시간을 살아낸 작가들의 창작물을 읽으면 더욱 가슴이 아리고 그들의 무거운 사명감이 느껴져 비장하다.


 현대 문명의 한계점에 이른 듯한 문명사적 전환점에서 철학자나 사회학자는 물론 작가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모색을 요구받고 있다고 본다. 사소한 삶의 결을 작품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작품이란 그 사소한 일상성을 통과하여, 또는 꿰뚫어, 보다 보편적인 시대정신에 이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작가에게,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간존재로사 자기동일성-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김영현 작가는 말한다. 이 땅에 민주화 구현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비민주화의 야만성을  목도했던 창작 세대가 짊어진 사명이라고나 할까.


  1990년 출간된 이 책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의 초판 후기에서 작가가 말하는 '소설가, 싸움꾼과 구도자'라는 글에서 이런 점은 잘 드러난다. 회사 생활에서 그가 느낀 것은 자본가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보다 덜 가진 자들을 모두 자신의 적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재벌의 비리로 인한 감옥행에는 동정적이고 이해심 많게 받아들이지만, 노동자가 약간의 폭력만 행사해도 죽을 상으로 매도한다는, 철저한 계급의식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목도하는 사실이다.


 결국 저항력과 도전력을 둔화시키고 인간을 나태하게 만드는 곳에서 스스로 나와 매듭을 짓고 창작에 매진하였다. 그의 글쓰기 자세는 두 가지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는 싸움꾼이고, 다른 하나는 구도자의 자세이다. 싸움꾼의 자세는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그러한 문제를 작품 속에 투영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고, 구도자의 자세는 글 쓰는 작업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의 철학적 인식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결국 자기 몫의 일을 하고, 그 몫만큼 발언할 수 있다고 한다. 언제나 원칙을 사랑했고, 원칙때문에 괴로워했으며, 분노보다는 눈물이 더 많았던 세대의 모습을 담은 그의 여러 단편들을 읽다보면, 그 시대를 통과했든지 겪지 않았든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담담한 문체 속에 드러나는 사회의 단면들에 때로는 분노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그가 느껴진다. 가장 낮은 곳에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은 이 땅의 주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덤덤히 보여주나, 옳고 그름은 확실히 담고 있는 그의 철학적 사고가 느껴진다.


<포도나무집 풍경>

 도시에서 온 놈들은 겨울 들판을 보면 모두 죽어 있다고 그럴거야. 하긴 아무 것도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농사꾼들은 그걸 죽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쉬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거지. 적당한 햇빛과 온도만 주어지면 그 죽어자빠져 있는 듯한 땅에서 온갖 식물들이 함성처럼 솟아나온다 이 말이네


<멀고 먼 해후>

적을 죽일 수 없을 때, 적과 동지의 양심을 동시에 난타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밖에 없어.

누군가가 인간은 벌레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면 돼. 두려움의 껍질 속에 싸여진 목소리를 꺼내면 순식간에 단결하게 될거야. 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비로소 이쪽이나 저쪽이나 사람 무서운 줄 알게 되겠지. 인간은 벌레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야.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거야. 그게 인간이야.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약삭빠른 생존경쟁의 논리는 승자에게 인격적인 우월설까지 부여하는 것이다. 기호에게는 차츰 나쁜 버릇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만기 형을 동정하는 버릇이었다. 동정심 뒤에는 언제나 일종의 경멸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 것은 모두 가져가 버리세요. 이 땅에 아버지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기지 마세요. 이제 영영 돌아오지도 마세요. 아버지의 죄와 만기 형의 폐병까지 몽땅 데불고 훨훨, 훨훨, 떠나버리세요.


<저 깊푸른 강>

 평범하고 따분한 그 풍경에서 나는 갑자기 우리들의 찢어진 삶을 보듬고 앞으로 나아가는 어떤 거대한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모든 소용돌이와 역류를 자기 가슴 속에 껴앉은 채 전진하는 깊고 푸른 강 같은 것이었다.


<불울음소리>

대장님, 죽을 때 죽더라도 알고나 죽읍시더. 도대체 백성 읎는 나라가 무신 소용이 있습니까!


#독서후기 #김영현 #깊은강은멀리흐른다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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