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의실 유리창에 그녀의 머리가 비친다. 사자머리 마냥 부푼 파마머리에 굴곡진 몸매.
나는 최대한 조용히, 그녀의 시야를 피해 탕으로 잠입하려 했으나... 실패!
"어이 동생 오랜만이야." 포착되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이 안쓰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꼼짝없이 그녀 곁에 앉아 들었던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와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천하제일 수다왕 김말숙 여사님 앞에서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니 말이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탕 안에 있는 그녀 곁에 가서 앉았다.
"어째 살이 더 빠진 것 같아. 요새도 운동 열심히 해? 친정엄마는 이제 안 오셔?"
한 번에 쏟아지는 질문이 여러 개라 순서에 맞게 답하기도 힘들다.
"살이 빠지긴요. 운동이야 살려고 하는 거죠. 엄마는 요즘 바쁘셔서 자주 못 오세요."
그녀는 우리 엄마를 6개월 전에 한 번 보았고, 그날은 엄마가 나 대신 김말숙여사의 말상대가 되어야 했다.
앞면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란 가릴 것 없이 탕에서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면 누구라도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아주 똑똑한 시골 소녀였고 19살에 돈 만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해 식당에서 일했다. 돈이 모이자 동대문에 옷가게를 열어 거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큰 갈빗집을 운영했다. 거기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장사가 잘 되니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주방장들이 속을 썩여 가게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통영으로 내려가 수입 품 옷가게를 시작했고....
사우나 사람들은 그녀 딸들의 직업과 손자의 나이, 사위의 직업까지 모르는 것이 없다.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내가 물었다.
"이렇게 오래 사우나에 계시면 힘들지 않으세요?"
"동생, 나 같은 늙은이가 어디 가서 당신같이 젊은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겠어. 내가 여기 매일 오는 이유가 궁금하지?"
"저는 오래 있으면 힘들더라고요. 성격도 좋으시고 체력도 좋으신가 봐요."
"저 사우나 안에 있는 여자들이 내 욕하는 거 다 알아. 목소리 크고 수다스럽다고 피하는 것도 알고."
나는 뜨끔했다. 내 마음속 그녀의 수다가 귀찮은 것이 들킨 것 마냥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나이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가서 시간을 보내겠어. 요새는 복지관에서 하는 수업들도 많이 줄어서 들을 게 없어. 나는 노래교실 갔다가 여기 오는 게 그렇게 좋아. 돈 만원만 들고 오면 하루 종일 땀 빼고 냉탕에서 운동하고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어딨어. 자식들은 지 필요할 때만 아양 부리지 다 소용없어. 여기서 만나 박카스라도 한 병 나눠먹는 사람들이 더 정이 간다. 그래서 나는 동생이 좋더라."
그녀의 미소에서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시골 사는 엄마는 딸기 밭에 일을 나가신다. 하루하도 더 건강할 때 놀러 다니시라 해도 들은 체를 안 한다.
"마을 사람들 다 일하는데 혼자 어떻게 놀러를 다니니? 같이 일하고 밥도 먹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은 일이고?" 어른들의 세상은 그러한 듯하다. 사람이 그립고 이야기 상대가 필요한 조금은 무거운 세상.
김말숙 씨의 이야기를 듣고 일어나려 하니 그녀가 나에게 박카스 한 병을 건넸다.
"오늘은 동생이 박카스 주인이네. 잘하고 가."
탕에 얼마나 오래 놓여있었는지 알 수 없는 박카스 병이 뜨뜻미지근 했다.
타인과 말 섞기가 힘든 나는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나도 곧 외로운 나이가 될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