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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Jan 23. 2022

어쩌다 보니 올레길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올레길

스물여섯 살의 배낭여행, 2020년도 올레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프롤로그.


 워홀과 세계 여행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결국 세계 여행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여행을 가겠다는 마음이 확고해졌으니 이제는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타보고, 남미에서 트레킹도 하고, 쿠바도 가보고, 아프리카도 가야지.' 

'언젠가 가겠지'라는 말에 가려져 있던 꿈이 조금씩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길거리 음식도 먹고, 경치도 보고, 한껏 들뜬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었을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국내 첫 확진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뉴스에서 처음 관련 방송을 접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저 지나가겠지 싶었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는 빠르게 퍼졌고, 일상을 흔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하늘길이 막혔다. 몇 개월 후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계여행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했다. 하늘길이 막힌 건 둘째치고 감염증에 대한 공포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꿈꿨던 여행이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번복되다니. 혼란스러웠다. 스스로가 선택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답답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일을 계속했지만 의욕이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 이대로 세월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어디든 떠나야 진정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 코로나에 걸리면 계속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후기로 인해 겁이 났고 꼭 가야 하는지 몇 번이고 물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하는 마음이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떠나야 했다.


 계획한 일정은 대략 한 달 정도. 떠나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나니 '다시 걸어볼까' 하는 마음이 일렁거렸다. 

순례길을 걸으며 돌아가면 우리나라의 길도 걸어보리라 생각했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 이번에는 우리나라를 보자.'


 우리나라의 길들을 찾아봤다. 해파랑길과 올레길로 후보가 좁혀졌다. 길을 선택할 때 고려했던 점은 두 가지다. 비박을 하지 않을 예정이었기에 숙소가 보장되어있어야 했고, 한 달안에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거리가 기준이었다. 해파랑길은 총거리가 750km였는데, 425km인 올레길에 비해 숙소가 현저히 적고 길도 정비가 덜 돼 보였다. 그래서 올레길을 선택했다. 언젠간 제주 한달살이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해지기도 했고. 


 

이번엔 제주로 간다. 수도 없이 망설였다. 가야겠다는 마음이 우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로 인한 불안감은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다. 내가 감염된다는 건 내 잘못이라고 해도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그 순간까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여기 있다가는 코로나에 걸리기 전에 화병이 먼저 날 거 같았으니까. 대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잘 챙기기로 모두와 약속했다. 그러나 만약 숙소를 미리 예약해두지 않았더라면 일정이 미뤄졌을지도 모르겠다.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 텅 빈 공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가 됐다. 이번에도 패스트푸드점을 먼저 찾았다. 언제부터인가 공항에 올 때마다 감자튀김을 먹다 보니 의식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잠시 여유를 가졌다. 저마다 서로의 눈동자만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공항이었다. 


 

 우웅 하며 이내 귀를 가득 채우는 엔진 소리와, 비행기를 향한 정비사들의 손짓, 그리고 거침없이 빠르게 땅과 멀어지는 비행기를 보니 묘했다. 창 밖을 보고 있는데 왜 이리 눈물이 핑돌까. 이륙의 순간 오묘한 감정들이 피어올랐다. 


 알게 모르게 갖은 이유로 억눌렀던 감정들이 새어 나온 걸까. 한 살이 더해졌다고 티 내는 건가. 참 주책이다. 그래도 이 찰나에만 누릴 수 있는 감정이니까 잠시 그대로 두기로 한다. 비행기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내달렸다. 노르스름한 초록빛의 땅, 빛이 바랜 붉은 지붕들, 높이 솟은 건물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꿈속일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연한 하늘빛과 하얀 구름 솜사탕이 가득한 세상이 펼쳐졌다. 넓고 무한한 세계를 꿈꾸게 하는 색들이었다. 새들의 기분이 이런 걸까. 이렇게 가끔 마주하는 이 순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몽글거리는 구름 덩이를 바라보다 뜨거운 햇살에 노곤해졌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제주에 왔음을 알려주는 돌하르방과 쭉 뻗은 야자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 나온 순간 느껴지는 습함과 뜨거움에 헉 소리가 났지만 이 정도 날씨임에 감사하기로 했다. 101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세화해수욕장 근처의 게스트하우스. 잔잔한 바다를 지나고 숱한 야자수들도 지나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멀리 떨어진 풍차도 스쳤다. 애매랄드 색의 바다 빛과 푸른 잎을 펼친 야자수들을 보니 제주에 왔음을 비로소 실감이 났다.  


 숙소에 도착해 배낭을 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휴 이놈의 업보. 뺀다고 뺐는데도 이모양이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걸어야 하니 오늘은 휴식 타임을 갖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카페를 물색해보니 가보고 싶은 카페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걸을 수 있는 거리니까 가보기로 했다.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야겠다. 그 네이밍에 한-참 부끄러운 거리지만.



 당근케이크를 함께 시켰다. 당근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언젠가 먹었던 당근케이크 맛이 괜찮았던 기억이 나서 시켜봤다. 그러나 그때의 당근케이크는 조금 달랐다. 똘똘 뭉친 꾸덕함을 홀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케이크는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지만 대신 그 위에 놓여 있던 견과류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유명한 카페인만큼 슬슬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작은 텔레비전을 활용한 인테리어가 이곳의 시그니처 포토스팟이었기에 텔레비전이 있는 이 공간은 금방 사람로 가득해졌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스피드. 황급히 자리를 정리한 뒤 옆의 공간으로 갔다. 


 진작 올걸. 바다를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맑고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니 가슴이 뻐엉하고 뚫리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그저 바다를 바라봤을 뿐인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그래도 알고 걷는 길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챙겨 온 '제주올레' 책자를 펼쳤다. 대망의 1코스. 길이가 얼마인고 보니 15.1km다. 순례길에 비하면 확실히 짧은 거리지만 그때의 체력이 자취를 감춰서 막상 걷는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다. 


 괜찮겠지,라고 막연하게 토닥거리며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해를 바라봤다.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멍하니 바다를 보고, 책자도 한 번 펼쳐보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바다도 서서히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어둠을 품은 바다는 한층 더 고요해졌고 가끔 바위에 부딪혀 흩어지는 파도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세계여행을 꿈꿨으나 어쩌다 보니 올레길에 왔다.

이 길은 또 어떤 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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