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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Mar 26. 2021

내 말을 돌려받는 밤

아이가 내게 주는 것들


 임신부 시절 그림책에 아이가 처음 '엄마'라고 부른 순간이나 첫 걸음마 하던 날을 옮겨 놓은 장면들을 보면 감격해 울곤 했다. 그런데 정작 애를 낳고 나서는 그날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 하다. 내가 원래 이렇게 무드가 없었나? 아님 피로 누적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인가? 죄책감에 시달리다 겨우 핑곗거리 하나를 찾았다. 내내 아무 말도 없던 아이가 꽃봉오리 터지듯 한 번에 '엄마'라고 불렀다면 놀랐을 텐데, 그전에 수많은 예고편을(마마마마, 음머음머 등)  본 바람에 덜 인상 깊었나 보다고.


그림책에서처럼 아이의 말에 눈시울을 붉힌 건 훨씬 나중이었다. 똑띠는 뒤집고 앉고 걷는 건 느렸는데 말은 또래보다 꽤 빨랐다. 아이가 이제 막 단어를 두 세계씩 붙일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집 앞 시냇가로 산책을 나갔는데, 앞서 뛰어가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우와, 엄마 저기 구름 좀 봐"라고 말했다. 망설임 없는 완벽한 문장이었다.


여긴 시골이라 도시에 비하면 풍경이 단조롭다. 그래서 매일 보는 논과 밭이 혹시 아이에게는 지루할까 봐 산책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이것저것 설명했더랬다. 논둑길에서 마주 보이는 산과 구름도 자주 들려준 이야기였는데, 똑같은 길에서 나와 똑같은 톤과 목소리로 아이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순간 가슴속 깊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무언가 차오르는  느껴졌다. 몹시 낯설었던 그날의 감정에는 아직까지도 이름을 붙이지 못했지만, 마음이 약간 들뜬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저릿한 느낌이었다. 내가  말을 처음으로 돌려받던 , 나는 부푼 풍선이 되어버린 가슴을  번이고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최근 27개월을 앞둔 아이의 말은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다. 슈퍼컴퓨터라도 되는 것처럼 귀로 들리는 단어와 문장들을 죄다 수집하는 것 같달까. 그리고 아이가 열심히 수집한 문장들 중 팔 할은 결국 내가 쓰는 단어와 문장이라는 점은 늘 조금 소름 돋는다. 덕분에 나는 내가 아이에게 하루 동안 무엇을 말했는지 매일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그날 밤 잠자리에서!


모든 집이 그럴 테지만 아이와의 잠자리 루틴은 정말 길고 지루하고 화가 치민다. 똑띠는 기어코 악쓰는 괴물 엄마를 봐야지만 포기하고 자는 편인데, 잠들기 직전에 꼭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본인의 애착 인형인 멍멍이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식이다. 당연히 그 대사는 전부 내가 낮에 뱉은 말들인 경우가 많다. 지난번에는 "멍멍아. 울지 마. 울어도 소용없어."라는 말을 해서 밤새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던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제부턴가 은근히 잠들기 전 아이의 독백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날의 가장 강렬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므로 엄마로서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젯밤에도 치열한 잠자리 전쟁 중이었다. 물 바꿔달라, 기저귀 갈아달라, 거실에 두고 온 장난감을 가져오겠다 등 잠자리 레퍼토리를 한 바퀴 돌고는 결국 괴물 엄마가 등장한 때였다. 사자후를 토한 뒤 내가 꼼짝 않고 자는 척을 하니 아이의 독백이 시작되었다.


멍멍아. 밥을 먹으면 힘이 세져. 힘이 세지면 날개가 생겨서 훨훨 날 수 있어. 날개가 생기면 찜질방에 갈 수 있어. 찜질방 할머니가 '어서와'해.
할머니 이제 안 아파."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요양병원에 계실 때, 아이에게는 병원을 찜질방이라고 하자고 엄마랑 말을 맞췄었다. 그 뒤로 같이 살았던 시간만큼을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3주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도 아이는 딱히 할미를 찾지 않았다. 그 점을 내심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어제 뜬금없이 "찜질방 할머니 안 아파?"라고 묻는 거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한 나는 겨우 울음을 삼키며 요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할머니 이제 안 아파. 하늘나라 찜질방으로 갔어."


옛날부터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너무 뻔하고 성의 없는 것 같아 쓰기 싫었는데, 갑자기 물어오니 생각나는 말이 그뿐이었던 게 지금도 아쉽다. 여하튼 아이는 그 말을 담아두었다 잠자리에서 그대로 돌려주었다. 내게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덕분에 어젯밤은 아이의 포근한 말을 덮고 모처럼 달게 잘 잤다.(코 먹는 소리를 내지 않느라 무지 힘들었지만)  


아,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정말 뭘까. 나이를 먹는 일은 별로지만 그나마 좋은 점을 꼽자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에 더 이상 일일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웬만한 감정 근육들은 한 번씩 써봐서 내게 나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피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나쁜 감정이 드러나는 일이 적다 보니 스스로 꽤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은 착각도 했었다. 그런데 순항하던 배는 출산과 동시에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아이는 지금까지 내가 하나씩 넣고 빼가며 수백 번도 더 수정한 '인생 매뉴얼'에 들어맞는 게 하나도 없고, 잘 덮어 놓았던 내 밑바닥에 자꾸 돌을 던진다. 그리고 이젠 내가 평소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인지 밤마다 '다시 듣기'를 제공해주며 울렸다 웃겼다 한다. 이 모든 과정들이 신기하고 기특한 동시에 무섭고 죄책감 쩌는 걸 보면 육아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오늘 밤 나는 또 어떤 말을 돌려받으려나. 똑띠가 선물을 줄까 죄책감을 줄까.


비정규 가족 탄생 D+251일. 우리 가족은 모두 안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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