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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Sep 23. 2020

전원생활 초짜들의 헛물켜는 이야기

99%의 평범을 사랑하는 일


양평에서 느닷없이 전원생활을 시작하게 된 지 2개월. 꼬박 아홉 번의 주말 동안 쉼 없이 몸과 돈을 쓰며 지냈더니 이제야 집 모양새가 제법 갖춰졌다. 관리가 잘 되긴 했으나 워낙 오래된 주택이라 수도, 보일러, 정화조까지 한 달은 정말 두더지 잡기 하는 심정으로 보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족 전원이 도시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살면서 몸뚱이 한 번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사무직들인 점이었다. 엄마가 꾸준히 본인은 부천에서 쌀농사를 지은 농부의 딸이었음을 강조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 오늘은 우리가 지난 두 달간 켠 헛물들과 전원생활에 대한 첫인상을 적어보고자 한다.


전원생활 애송이들은 마당 식사를 즐겨합니다.

이사 오자마자 마을을 둘러보니 집집마다 야외 테이블과 파라솔이 있었다. 역시 전원생활의 꽃은 바비큐인가! 그 길로 바로 펜션 테이블과 바비큐 그릴을 검색했다. 앞으로 완제품 아닌 건 사지도 말라며 흥건한 땀과 함께 테이블을 조립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기필코 뽕을 뽑으리라 다짐했다. 그 후 주말 저녁이면 어김없이 숯불을 피우고 끼니가 될만한 것들은 애써서 마당에 나가 먹었다.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응당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칙인 것처럼. 그렇게 두 달을 애쓰는 동안 다른 집 식구들이 마당에 나와서 식사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프로의 식사란 모름지기 쾌적한 실내에서 하는 것이었다.


한 여름 더위에 에어컨 잘 나오는 실내를 두고 나와 먹는 열정, 전원생활 초짜들이 겪는 흔한 증상입니다.
이게 바로 양평 플렉스(flex)

양평에 와서 제일 놀랐던 점은 편의점만큼이나 많은 철물점 수였다. 읍내를 돌면서 남편이랑 연신 "와, 이 철물점들이 다 장사가 된다고?!"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실 도시에 살 때는 갈 일이 없어서, 수를 마땅히 헤아려 본 적이 없기도 하다.) 철물점이 왜 그렇게 많은지 깨닫는 데는 2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마당을 가꾸는데도 전지가위며 낙엽 갈퀴, 하다 못해 마대자루까지 필요한 게 어찌나 많던지. 그리고 철물점에는....다 있다! 진짜 다 있다! 앞으로는 올리브영과 다이소 말고 철물점에서 플렉스 해야겠다.


두 번째로 양평에서 돈 쓰는 재미가 있는 곳은 5일장이다. 양평에는 지역마다 5일장이 열리는데 집 밭에서 일군 것들을 조금씩 내다 파시 기도 하고, 꼬박꼬박 출석하는 인기 먹거리들도 많다. 동네 어르신께서 원주민들은 롯데마트에서 장을 본다는 말에 조금 김이 새긴 했지만, 관광객만 가는 시장이면 또 어떤가. 원곡을 가늠할 수 없는 뽕짝과 기름 냄새만으로 들뜨고, 기다려지는 꽈배기 아저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작은 이벤트가 된다.  

양평 5일장 중 규모가 큰 용문시장. 매달 5일과 10일에 열린다.
힘쓰지 못하는 자는 잉여고, 상추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사는 남동생이 어느 날 식탁에서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이등병 때 이후로 이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전원생활은 어서 일어나라고 보채는 일들 뿐이다. 이때까지 나는 풀들의 무서운 생장력을 알지 못했다. 비가 한번 오고 나면 그들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거미는 꼭 폐교나 폐가에만 집을 짓는 게 아니란 것도. 장마철 습기를 머금은 나무 문들은 빵빵하게 부풀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는 것도 여짓 모르고 살았다. 그러니 잔디를 깎고, 씨앗을 뿌린 적 없는 버섯을 뽑고, 거미로부터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으려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힘쓰는 요령이 없고, 엉덩이도 무거운 나 같은 사람은 이곳에서 잉여가 된다. 엄마는 암환자라는 방패라도 있지, 나는 애 본다는 핑계마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노동의 달콤함을 일찍 맛본 우리 집 대장님

그래서 여자들끼리 뭐라도 거들어 보려고 생각한 것이 상추 심기였다. 상추는 아파트 베란다나 옥상에서도 잘들 키우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원대한 포부를 안고 화분과 흙도 사고 비료도 넉넉하게 부어서 상추 모종을 심었는데 웬걸, 일주일도 안돼서 상추가 다 죽었다. 나도 엄마도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암환자가 있는 집에서는 모든 죽어나가는 것들에 곧잘 의미부여를 한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여름 상추를 잘 키우려면 태양을 피해야 한단다. 온도가 너무 높아지면 성장이 둔해지는 탓이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마당에서도 해가 특별히 더 잘 드는 쪽으로 화분을 뒀으니...다음 주에 오기로 끝물이었던 상추 모종을 다시 사서 심었다. 해가 뜨거울 시간에는 햇볕도 가려주었다. 그러니 이제야 상추들이 기를 편다. 이대로 쭉 해피앤딩이 되겠지?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모월모일>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삶이 1%의 찬란과 99%의 평범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나는 99%의 평범을 사랑하기로 했다."

전원생활 두 달. 모르고 살았어도 별 탈 없었겠지만, 알고 나니 잔잔한 일상에 물결을 일으키는 일들이 자꾸 생긴다. 덕분에 내게는 어렵기만 했던 99%의 평범을 사랑하는 일이 조금 더 쉬워질 것 같다. 비정규가족 탄생 D+66일. 오늘도 우리 가족은 모두 안녕하다.


<전원생활의 겨우살이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lieu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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