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가치관이 비슷한 친구들, 차가운 와인, 수영, 요가, 바다, 햇빛 좋은 날 수영장, 바보같이 웃다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 자연을 보며 경탄하기, 진심이 담긴 인사, 다정한 말, 다정한 눈빛, 다정한 포옹 등
긴 주말을 보내고 오는 길,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잠에 빠질 준비를 했다. 께레타로에서 멕시코시티까지 이동하는 길은 버스보다 블라블라카라는 카풀 서비스를 이용한다. 이날은 카를라라는 여성 운전자의 차를 탔다. 나 말고 다른 동승자들은 이미 안면이 있는 듯 인사를 나누었고 그 후 나를 향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다. 몇 살이야, 멕시코에는 일하러 온거야, 공부하러 온 거야? 같은 기본적인 질문 등등
올해 스물아홉인데 12월에 서른 살이 돼. 그런데 요즘 길을 잃은 느낌이야. 뭐랄까, 에너지도 넘치고 하고 싶은 것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 주변 것들만 빙빙 돌며 열심히 하고 있어. 새벽 6시에 운동을 가고, 회사에 가고, 그 이후에 한국어 수업을 하고, 스페인어 수업도 듣는 것처럼. 하루가 끝나면 몸이 너무 피곤해. 그래서 기절하듯이 잠을 자는 일상이 이어지는데 그래도 무언가 놓치고 있는 느낌이야.
옆에 앉은 남자는 맞아, 우리 그럴 나이야.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는 나이. 그런데 너는 지금 무언가를 더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조금 놓아야 할 것 같은데. 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런가? 싶었는데 이 말이 계속 맴돌았다. 여행이 끝나고 이틀 뒤에도 생각나는 것처럼. 무언가를 놓아야 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풀어줘야 할까. 그리고 성격상 느긋한 일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근 2주간 얼굴에 미소가 둥둥 떠다녔다. 정말로 가고 싶었던 화산 트래킹을 다녀왔고, 그 다음 주에는 오수를 보러 산미겔데아옌데에 갔다. 산에 가면서 의식적으로 멀리했던 케빈을 3개월 만에 만났다. 작년 9월에 악셀이 친구와 캠핑을 간다면서 나도 초대했는데 그 친구가 케빈이었다. 아빠랑 오래전부터 캠핑을 다녔다던 케빈은 텐트를 치고, 호수가 잘 보이는 자리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맥주 한 캔을 마시면서 오랜 시간 사색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중간중간 서로 시답잖은 농담을 해도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크게 웃는 케빈 덕분에 우린 이틀 만에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건축가인 케빈이 프레임 안에 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의 시선을 훔치듯이 찍는 사진마다 감탄하며 보았다. 케빈은 길에 핀 꽃을 봐도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고, 하늘과 구름, 산 등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조화롭게 담아내었다. 그때 너른 들판을 걸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했다. 팬데믹 때 어떻게 보냈는지, 하루가 끝나고 집에 오면 무얼 하는지 등 별다를 것 없는 시시콜콜한 주제였는데 그래도 대화하면서 서로의 가치관이 보였다. 그 이후에 일하느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케빈 생일 때 직접 구운 케이크를 선물했고, 케빈은 내 생일 전날에 저녁을 사주었다.
그런데 우리 둘이 친구가 되자 악셀이 너무 눈을 흘겼다. 너 이제 나보다 더 케빈이랑 친구구나. 그냥 별거 아닌 듯 넘기면 되는데, 그런 말을 자주 듣다 보니까 무의식적으로 조금 멀리하게 되었다. 악셀이 그런 얘기를 할 때는 뭐랄까, 진절머리가 난 시점이었다. 악셀은 외국인인 마이떼와 나를 자주 친구들과의 파티에 초대를 해주었는데, 그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다섯 살짜리 남자애가 하듯이 우와, 얘가 너 좋아한대. 얘가 데이트 신청하면 갈 거야? 이렇게 집에 갈 때까지 물어봤다. 처음에는 웃으며 아니, 난 지금 누구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라고 돌려 말했지만 악셀은 끈질겼고 그래서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쉽게 내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한테도 질렸었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알고 마음을 표현할까, 너무 싫은데? 이렇게.
처음 본 사람이라 친절했던 것뿐인데 너는 이런 사람이구나, 쉽게 규정하고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예쁘고 좋은 말만 하는 것 같아, 라고 하면 아 너도 참 지루한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악셀은 종종 케빈이랑 나를 엮어댔는데,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며 케빈이랑 왜 좋은 친구가 됐는지 설명했다. 케빈은 내가 이런 이런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그냥 대화를 이어나갈 뿐, 어떤 단어로 규정하지 않아서 편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악셀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고 나는 눈앞에 놓인 대화가 불가능한 어린 남자애를 보면서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케빈을 조금 멀리했다. 그런 악셀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싫어서 거리를 뒀다. 어쨌든 케빈은 악셀의 친구니까. 그러다 이번에 등산을 가면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다. 이번 여행은 푸에블라 근교 산으로 난이도가 높아 꼭 가이드와 동행을 해야 하는데, 케빈의 누나가 그 가이드 역할을 했다. 케빈의 누나인 까띠아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면서도 자연이 주는 평온함이 좋아 등산 에이전시를 열어 주말마다 운영한다. 여행 시작 전, 까띠아가 그랬다. 네가 좋아할거야, 이 투어는 오직 너를 위한 거거든. 그날 별이 비처럼 쏟아질거야.
문자를 받고 입이 귀에 걸렸었다. 그리고 나중에 까띠아한테 말했다. 근래 내가 받은 문자 중 제일 로맨틱한 문자였다고.
그렇게 악셀, 까띠아, 케빈, 그리고 나까지 4명이 모여서 여행을 갔다. 케빈이 슬리핑백과 캠핑 도구를 트렁크에 가득 실어 나타났고, 우리는 오후 늦게 캠핑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에 든 후 자정에 등산을 시작하는 일정이었다. 텐트를 치고 그 안에 걸터앉아 저녁으로 싸온 파스타를 먹으며 설산을 바라보았다. 케빈이 옆에 앉으라며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그것마저도 고민했다. 악셀이 보면 분명 시끄럽게 말할게 뻔하니까. 그래도 결국 앉았다. 우리는 작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며 깔깔거리다가 케빈이 먼저 아까 산에 올라오면서 본 풍경 때문에 슬펐다고 말했다. 2년 전에는 나무가 울창했고, 거기에서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였는데 지금 산 입구는 무분별한 벌목으로 나무가 다 잘려있었다. 댕강댕강 잘려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까띠아가 말하길, 얼마 전 한 가이드가 산을 지나가는데 하늘에서 가방이 뚝 떨어져서 안을 열어보니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단다. 곧 경찰이 나타나, 지금 아무것도 못 본 거고 가던 길 가라고 했는데 이후 가이드가 관련 기관에 신고해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벌목꾼에게 이 산은 노다지였을 거고, 경찰까지 매수했으니 거리낄 게 없는 환경에서 산은 순식간에 황폐해졌다.
그런데 나는 그런 환경을 보고 화를 내고, 어떤 기관에 신고해야 할지 알아보고, 결국에는 조용한 어느 순간에 슬펐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케빈이 좋았다.
산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우리는 내일 메고 갈 가방을 챙겨 잠자리에 들었다. 케빈 누나인 까띠아는 능숙하게 헤드라이트 하나를 천장에 묶어 빛을 만들어냈다. 나는 가져온 손난로를 까띠아에게도 건너며 밤에 추울 텐데 쥐고 자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쳤다. 우리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바람에 휩쓸려 다시 시티까지 가는 게 아니냐고 농담을 했지만, 텐트가 너무 흔들려서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아홉시 정도에 비가 멈췄고 까띠아가 말한 것처럼 별이 쏟아지는 황홀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후로 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밤 12시에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커피를 한 잔 마시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빈속으로 오르고 싶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전날 고산병 증세로 귀가 약간 아팠던 게 생각나 껌 하나만 입에 넣었다. 그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등산이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서 앞사람의 발만 보고 걸었다. 까띠아가 맨 앞, 케빈이 맨 뒤를 맡아 대열을 정비했다. 속도를 늦추면 추위에 노출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간다고 했는데 따라가기만 해도 호흡이 가쁘고 땀이 나 온 몸에 온기가 돌았다. 어느 구간에서는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듯이 매서웠고, 어떤 곳은 모든 게 평화로워 감사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시간을 가늠하지 않은 채 정신없이 걷다가 앞을 바라봤는데 하얀 빛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이어졌다. 별일까, 사람일까 고민될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그 빛이 아득해 두렵기까지 했다. 다행히 멈춰 선 곳에 있는 대피소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12시 40분에 길을 나선 지 3시간 만이었다. 어떤 이들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서로 껴안고 추위를 견뎠다. 악셀은 얼마나 추웠는지 콧물이 밖으로 나오다 못해 위에까지 퍼져있었다. 애써 못 본 체하며 장갑을 빌려줬다. 허기가 몰려와 초코바 2개를 꺼내 먹고 사람들 틈에 껴서 잠시 앉아 잠을 청했다. 동이 터올 무렵 다시 나왔는데 눈이 가득 내린 새하얀 배경 위로 물드는 붉은빛이 눈앞의 모든 풍경을 가득 채웠다.
벅찬 마음과 지금 이곳에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 다시 현실을 바라보게 하였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풍경은 이런 것이구나. 다른 한쪽에서 악셀과 케빈은 산 정상을 바라보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케빈이 Qué ganas de ir(정말 올라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눈 앞에 놓인 자연을 보며 경탄하고, 있는 힘껏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왜 멀리했을까, 하는 후회가 일었다.
내려오는 길은 좀 더 수월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밭과 그 위로 보이는 화산을 담고 싶어 사진을 찍느라 뒤처지자 까띠아가 이해한다며, 이런 풍경을 보는 것도 참 운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까띠아는 두 달 후에 캐나다에 간다며, 일 년의 반은 비가 오는 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지낼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말했다. 멕시코에서도 산에 오르고 걷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캐나다의 대자연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까띠아는 심지가 곧고 단단한 여성이었고, 그간 해낸 프로젝트를 보여줄 때도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저 말이 심장을 쾅 하고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잠깐 발을 삐끗해도 뭐 어때, 내가 어디에서 온 지, 기반을 두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금방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엄마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사실 케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인생을 즐기는 법,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작은 요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배웠기 때문에 아주 많은 부분들이 아직까지도 함께 한다고 했다. 아름답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지만, 까띠아가 보는 관점이 너무 아름다워서 울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었다.
캠핑 장소로 돌아가서 텐트를 정리했다. 이런 것도 다 예전에 케빈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캠핑을 한다는 것 또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었다. 근처에서 산 향긋한 커피와 하루 전에 사온 크루와상을 먹었다. 행복하네. 넘치게 행복하네. 이런 말들을 하며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갔다. 운전은 케빈이 했고 나는 뒷좌석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헤어질 때 케빈한테 금요일 아침 7시 요가 수업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주 좋아하는 요가 선생님이 있는데 수업 끝에는 카드점도 보고 너무 재미있다고, 너도 좋아할 거라고. 케빈은 정말로 금요일 아침에 요가원에 왔고 땀을 뻘뻘 흘리며 끝까지 수업을 들었다. 열심히 따라 하는 케빈이 기특했는지 아니면 불쌍했는지 요가 선생님인 아드리아나는 오늘 수업 정말 힘든데 잘 따라 한다고 아주 보기 좋다고 한마디 했다. 사실 나는 바들바들 떠는 케빈이 너무 웃겨서 수업 중간중간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웃었다.
머리카락이 다 젖은 케빈은 기분이 아주아주 좋다며, 다음 주에도 오고 매주 오겠다고 했다. 나는 또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그럼 다음 주에도 보자고 했다. 기분 좋은 금요일이었다. 운동을 하고 난 뒤 몸은 구석구석 개운해졌으며,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친구도 생겼다. 당연히 마이떼한테도 말했는데, 마이떼는 요가가 그렇게 힘든 운동이라면 절대 안 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아무튼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본 친구들은 우리가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 보는 재미가 있다면, 어느 정도 가치관이 성립이 된 상태에서 만난 친구들은 잘 쓰인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종이 아래를 만지작거리면서 느긋하게 읽고, 또 어떤 곳은 가슴이 먹먹해서 눈을 오래 뗄 수가 없기도 한다.
사실 산미겔에 가서 아께미를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직한 이유 중 하나가 회사에 아웃소싱 인력이 없기 때문이란다. 건물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 경비원 모두가 회사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호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의 아께미한테 정말 반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상기했다.
집으로 돌아가 마이떼한테도 이 이야기를 했는데, 마이떼가 “그렇지, 보통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가치니까. 아께미도 참 멋있네.”라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서 감동을 느꼈는지 바로 잡아내고 공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왜 이 아이를 좋아하고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개구지고 장난기 많은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마이떼가 어느 날, 나는 이제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고 했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보낸 우리는 같이 성장하고 단단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다채롭게 유지하는 건 익숙한 이들에게서 얻는 영감, 시시콜콜한 농담, 함께 나누는 기쁨이구나. 가끔 삶의 무게에 못 이겨 가라앉을 때도 있겠지만, 친애하는 친구들 덕분에 그 시간이 길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이 물밀듯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