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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uco Nov 21. 2020

현대의 '정주'

정해진 곳이 아닌 정하는 곳에서의 삶

커피숍이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만이 아니듯이 내 집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 집이 있는 장소는 살기 위함 만이 아닌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 장소야야만 했다. 그렇게 뒤돌아보니 난 생각보다 집에 대해 오랜 기간을 두지 않았다. 변화는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다소 귀찮았을 뿐 하지만 필요했던 것이었다.

커피숍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 가지만, 사람을 만나기 위한 아니 볼 수 있었던 아날로그 했던 장소들이 사라진 지금은 커피숍, 카페라는 공간이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날로그 했던 장소라는 것은 디자인적 요소를 일컫는 것뿐이 아니라 행위로써의 장소를 말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시계방을 가고 세탁소를 가고 집 앞 슈퍼마켓을 수시로 다니면서 가졌던 관계들에서의 행위적 아날로그 함이 사라지고 그 어느 따뜻한 정을 집 근처 카페에서 그 카페의 점원과의 짧은 대화에서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시계 약이 떨어지면 시계방에서 약을 갈고, 퇴근길에 들리던 슈퍼마켓과 직접 찾아가는 세탁소 방문 그리고 길에서 그들을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그 낯익은 모습들이 그리웠다. 서울의 집 앞에 있던 오래된 그 카페는 요즘 카페처럼 세련된 건 아니지만 기가 막히게 맛있는 커피와 다정한 점원들의 친숙함에 내 집처럼 드나들었었다. 날이 좋을 때는 카페의 접이식 문을 활짝 젖혀두는데, 골목 입구에 자리 잡은 카페의 위치 덕에 열린 창가에 앉아있을 때면 종종 아는 이가 카페 앞을 지나가고, 난 커피를 홀짝이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다. 그 바쁨도 마음으로는 여유로웠다.

 서울에서 내 집은 그런 위치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마을의 풍경들이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집의 위치가 바뀌지 않아도 주위의 풍경이 바뀌어 버리면,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이 서있는 위치는 바뀔 리 없으니 소중히 생각해 고른 집인데, 주변의 풍경이 달라지니 위치와 관계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집은 들어서 옮길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곤란했다. 풍경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런 순간 이사를 결심했다.


서울의 그 집이 종점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옮겨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정주(定住) :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삶.

오히려 이사를 다니면서 더욱더 여러 공간을 경험해 보고 싶어 졌다. 예전의 우리의 삶은 정주라고 하여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관계를 갖고 인생을 꾸려나가는 그런 삶이었다. 많은 건축가들이 터를 잡고 사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했고 하이데거의 실존주의가 이러한 관점을 나타낸다고 하기는 하지만, 반면 건축이란 사람이 물리적이고 인간적인 지형학 속에서 존재하고, 그러한 존재와 장소나 거주자의 특성에 의해서 구축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거주하는 인간, 건축, 삶의 연관성이 시간에 따라 얽히어 건축물의 형상이 거주의 현존을 드러내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의 거주하기와 건축하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건물이 비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서는 집의 이미지는 두 방향으로 작용하며 우리들이 집안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집 또한 우리들 안에 있다고 했다. 또한 서랍, 상자, 장롱과 같이 사물들이 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미지로 대체될 수도 있다고 했다.

시대도 달라졌지만 여전한 것은 집 자체만이 정주의 거주의 의미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있고 그것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그 환경이 변화한다면 집 자체의 건축물의 의미만이 아닌 장소가 바뀌더라도 집안의 사물들과 거주자의 삶의 방식으로 정주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을까 한다. 

예전의 한옥에서 사는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 중의 하나가 창밖으로 보는 풍경이었다. 풍경을 빌려서 보는 의미의 '차경'이 그것이었는데 사계절의 변화 등을 창으로 보는 것이 하나의 액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변화는 예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현재는 그 시절보다 변화하는 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동 속도도 빨라졌다. 정주하는 삶이 바르다 여겨 행복하다 여겨 혹은 그렇게 사는 것이므로 라고 생각해서 인지 그 삶을 위한 주택정책은 계속 발표된다. 그런데 그 정책이 새롭게 발표되었다고 해서 진보라고는 할 수 있을까? 처음 건축을 공부하면서 정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설레었지만, 이제는 그 단어의 의미가 꼭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머무른다는 의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편안하게 만들 권리가 있고 그 일중 하나가 자신의 터를 만드는 작업 즉, 정주에 해당되기도 하지만, 매일같이 부서지고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과 빨라지는 이동수단들처럼 달라진 변화에 그 속에 있는 우리의 집을 단순히 한번 사면 평생 사는 곳이라는 의미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주할 수 없고 내 집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자신의 정해진 한 장소가 아닌 지금의 변화에 맞는 원하는 풍경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것이야말로, 같은 풍경에서의 살 수있는 권리. 즉, 또 다른 의미로서의 정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정주'는 정해진 곳이 아닌 정하는 곳에서의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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