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소방관 아저씨와 미드 주인공 언니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
냉랭하게 정적이 흐르는 차 안 공기.
시계를 보니 자정이 훨씬 지났다.
끝없이 달리기만 할 것 같은 택시가 어느 한 마을 입구로 들어간다.
아,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감사합니다! 난 진심으로 내가 그 말로만 듣던 국제미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무모한지 그제야 실감이 됐다. 영어도 못하고 덩치도 작은 이 동양 여자애가 자정이 다돼서 혼자 택시를 잡아 타는 그 무모함이란.
동네 입구를 돌아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택시. 늦은 시간이어서 인지 불이 켜있는 집이 없다. 경유하는 공항에서 너무 감사하다는 짧은 글과 도착하는 시간 정도만 보내 놨는데 내가 어리바리하는 사이에 밤 12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똑똑, 하고 두드려야 하나? 이게 생판 모르는 남한테 무슨 민폐란 말인가.
"Ok. We are here."
내가 못 알아들은 줄 알았나 보다. 친절하게 미터기를 가르치며 이제야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는 택시기사 아저씨. 미국 지폐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그때. 주섬주섬 100불을 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직접 팁까지 떼고 돌려줬더라. 뭐 납치 안 당하고 온 것에 기뻐하며 서둘러 차 안에서 내렸다. 성이 잔뜩 난 이민가방을 끌어내는데 뒤에서 한국말이 들린다!
"아이고, 어서 와! 이게 뭔 일이라니."
한국말 못 들은 지 대략 30시간.(돈 한 푼이라도 아낀다고 경유를 두 번이나 해서 미국 워싱턴 디씨 공항에 도착했다. 웃긴 건 국제 비행기 처음 타보는 것에 들떠서 경유 8 시간 되는 노선을 굳이 선택했다는 사실) 어쨌든 하루 조금 넘는 시간만에 들은 한국어가 이렇게 반갑다니! 뒤를 돌아보니 선해 보이는 인상의 한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웃고 계셨다. 선한 얼굴이지만 고생을 많이 한 흔적이 묻어나는 얼굴. 우리 엄마 나이 정도로 보이시는 이 분 뒤엔 뭔가 아주 단단해 보이는 한국 아저씨 한분과 딱 봐도 나 교포다! 하고 쓰여있는 어떤 여자분이 서 계셨다.
"강원도 소방관 아저씨와 미드 주인공 언니"
그런데 이 사람들, 왜 그랬을까. 이름도 모르는 어떤 애가 한국에서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왜 밤 12시가 넘도록 다들 그렇게 문가를 서성였을까? '그냥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 말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원래 들어가려고 했던 그 방엔 강원도에서 오셨다는 소방관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에 8개월 연수 오셨다는데 사실 확인은 못했으니 그냥 믿는 수밖에. 덥수룩한 머리. 구수한 말투. 이 아저씨랑 얘기할 때면 자꾸 내가 강원도에서 민박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드에서 한국인 교포를 주인공으로 하면 바로 캐스팅될 것 같은 태닝을 한껏 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 주인아주머니 막내딸.
"어서 와. 반지하는 처음이지?"
그랬다. 이 집에는 2층에 방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교포 언니가, 다른 하나는 강원도 아저씨가 쓰셨다. 주인아주머니는 하루 종일 델리에 가서 일하신다고 본인은 거실에서 잠만 주무신단다. 그럼 저는요? 그렇다. 난생처음 반지하라는 곳에서 살아보게 되었다. 그제야 느낀다. 참 고생 모르고 자랐다는 사실을. 자식 외국에 풍족하게 유학 보낼 정도는 안돼서 그렇지 항상 따듯한 밥과 편한 잠자리를 제공해주신 부모님 덕에 참 편하게 살았다. 남의 집 귀한 자식 이런 곳에서 재워서 마음에 걸리신다는 아주머니. 일단 며칠만 있어보고 다른 방 구하라고 본인 이불 중에 가장 두꺼운 걸로 챙겨주신다.
설렘. 불안감. 낯섦. 그리고 처음 겪는 시차.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잠이 오지 않던 첫날밤.
"나,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