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運 타령
과거의 행위는 끝난 것이고 변치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의해 언제든지 바뀌더라, 는 걸 우린 안다.
이루어냈다면 그 시간은 성공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무용담이 되는 것이고 이루어내지 못했다면 그냥 흑역사로 남는, 시간의 신비.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길게 느껴졌던 어릴 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그 시간은 자체로 의미가 있었고 앞으로의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그리고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지난 4월에 치러지고 5월에 필기 합격자를 발표한 국가직 공무원 시험에서 어떻게 직업상담 직렬이 서울 교행직을 뚫고 커트라인이 가장 높을 수 있는지 여전히 의아하지만, 격렬한 저항감 역시 내 불운의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며 담담淡淡해지고 있다.
당사자인 나보다 주변에서 더욱 안타까워하는 커트라인 마이너스 1점. 한 문제 차 낙방.
허탈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얼마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달 혹은 몇 년을 몰입한 공무원 시험에서 한 문제 차로 떨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잘 지내고 있는지, 커뮤니티라도 구성해 안부를 묻고 싶은 연대감이 든다. 시험이란 그러하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공부가 잘 되는 것과
시험을 잘 보는 것과
합격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상대평가로 점철된 이 비정한 세상은 내가 잘해서 합격하는게 아니라 남이 못해서 합격하는 원리로 움직인다. 그것이 바로 운.
어느 필자의 생각이 와닿았다. "운이 들어오는 경로는 4가지뿐"이라는 것.
<럭키>中, 86쪽. (김도윤 지음/ 북로망스)
내 생각에, 이 중에 개인적 요인은 양심상 기본이다. 나의 실력과 노력이 부재하면 다른 운이 들어와도 잡을 수 없거나 일단 잡았더라도 지속이 안 된다. 그러나 지나온 과거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들여다보다 보면, 적어도 어떤 일이 성사? 결실? 까지 되려면 개인적 요인 하나만으론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다른 요소 한 가지가 더 따라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 나의 국가직 시험의 패착을 여기에 적용시킨다면 "시대적 요인"의 결핍으로 분석할 수 있다. 올해 선발인원은 125명이었다. 작년처럼 180명을 선발했다면,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는 불상사는 면했을 것이다. 그래 저 점수를 받고도 떨어지다니... 2022년 국가직 공무원 직상 직렬의 평균 95점자들은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것이다. 안 좋은 일이지만 납득이 되면 그나마 마음이 풀린다.
그렇다면 운은 고정된 것일까? 변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것이 나의 노력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故 신해철 님께서 그런 말을 하셨지. "성공은 운이고 운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야")
다만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딘가로 불어가듯 운도 어딘가에서 오고 어딘가로 가는 것이고, 순간의 바람이 있고 몇 달짜리 계절이 있듯 운의 생명도 그러할 거라는 것.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 혼자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기에, 모든 게 상대적이고 연결되어 있기에 나는 고요히 앉아만 있어도 옆사람이 지나가면 먼지가 펄럭인다. 나만 잘한다고 따라주는 게 운이라면 얼마나 심플할까.
양치질하면서도 영단어를 보고 한국사 인강을 자장가로 삼던 지난겨울의 내가 있었다. 2022년 봄의 안타까운 운運 타령은 이쯤 하기로 한다. 때맞춰 머물러준 <나의해방일지>와 <우리들의블루스>가, 그래도 위로가 되었던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