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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다 Jul 10. 2022

그만 성장하기를

입원 소감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이 주는 울림 때문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느냐는 꾸지람은 고막에 와닿지도 않았다. 3년 만에 한 정기검진 초음파에서 4cm였던 혹이 7cm로 커져 있는 걸 확인했다.

거봐, 끝없는 성장은 식물에게나 좋은 일이야. 인간은 그렇지 않아, 생각하며 의뢰서를 받아 들고 나왔다.

가라앉은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큰 병원에 전화를 해서 생각해둔 의사 선생님을 지목하니

초진 날짜가 앞으로 3주 후라고 한다. 예약을 하려던 중 내게 1차 병원에서 써준 의뢰서가 있는 상태라는 걸 알고는 바로 이틀 후로 면담 시간이 당겨졌다.

당장 죽을병은 아닌데... 왠지 우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 주는 것만 같은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받았다.


외래 진료 날이 되어 담당 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하고, 자라고 있는 혹이라 수술은 불가피하다 하니

바로 날짜를 잡았다. 수술 전 해야 할 검사들까지 다 하고 왔다. 그리고 입원 전에 코로나 검사만 추가했다.

예정된 입원 기간은 3박 4일. 첫날 오후에 입원해서 마지막 날 오전에 퇴원이므로 시간으로만 보면 2박 3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말로만 듣던 복강경 방식. 한 시간 내외 예정의, 선생님의 입을 빌리자면 간단한 수술이다.

고통도 불편함도 내가 인지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무섭지가 않다. 수술이 잘못될 걱정? 글쎄 생소하고 희귀한 질환이라면 모를까. 나는 우리나라의 의료진과 기술, 서비스를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다.

단지 두려운 건 블랙아웃의 시간이다. 내가 "나"이면서 내가 모르는 시간. 부스럭 소리가 난다고 깨는 것도 아니고 누가 흔들어대도 일어날 수 없는, 산 건지 죽은 건지 모르겠는. 그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수술 직전 나를 성모님 하느님 찾으며 기도하게 만들고 혈압을 140까지 올려놓았다.

수술실 침대 누워서도 주치의를 찾으며 손을 잡아달라는 둥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는 둥 춥다는 둥 말로 진상을 떨고 있는데 전날 밤부터 맞고 있던 정맥주사로 마취제를 주사하려다가 막혔나 보다. "어? 이거 다시 뚫어야겠는데?"라는 전공의들의 웅성거림을 마지막으로... 나의 진상짓은 끝났다.

눈 뜨니 회복실. 따듯했다. 그리고 양쪽에 선 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안 추우시죠? 수술 잘 끝났어요."


바캉스도 호캉스도 아닌 "병캉스", 라고 해야 하나

숲 뷰 2인실, 친절한 간호간병통합병동에서의 호젓한 입원 생활은 꽤 할만한 것이었다.

수술 당일은 중부지방 장마의 시작이 예고된 날이었다.

종일 창밖으로 퍼붓는 비를, 수술이 잘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마취가 덜 깬 기분으로 그냥 한없이 감상했다. 달리 할 것도 없고.


정기검진을 시작으로 한 달 안에 갑자기 입원과 수술, 회복까지 마치게 되었다. 그러한 시간들 틈에 평소에는 할 필요가 없던 이런저런 생각이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드라마틱하자면, 이런 일을 계기로 새사람이 되거나 적어도 전에 없던 결심 하나 정도 만들어지면 보기 좋을 텐데, 그럴 일은 없었다. 늘어진 일상으로 지연스럽게 돌아가는 이 기특한 탄력성.


그래도 몇 가지 소감이 있으니 _

1. 5인실이었다면 잠을 한숨도 못 잤을 것이다. 아, 예민한 나는 돈 벌어서 이럴 때 이렇게 써야 하는 인간이구나, 더욱 벌어야겠구나. (지치는 기분+파이팅 스피릿)

2. 앞으로 노령 싱글로서 맞게 될 이런 상황에 대해 평소 걱정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막상 이번 일을 겪고 마음이 한결 놓였다. 2인 실과 간호간병통합병동과 실손의료보험과 좋은 의료인이면 필요 충분이고

퇴원 후 국을 한솥 끓여주는 식구라든가 복숭아 통조림을 사주는 친한 친구 한 명까지 있다면 행복한 인생인 줄 다.

3. 어떤 상황에서도 혈압과 당뇨는 없는 게 좋다. 이 부분은 유전력 없는 부모님께 감사한다. 지금처럼만 꾸준히 유지하자.

4. 평소에 운동을 좀 하거나 체력이 있으면 확실히 회복이 빠른 것 같다. 특히 근육운동에 더 신경 써보자.

5.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줄 사람이 있고 생각보다 호의적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선뜻 기꺼이 그렇게 했음을 잊고 있었다. 그 호의의 기분을 자주 떠올리며 살아야지.

6. 수술실 앞까지는 따라올 수 있어도 수술대에는 결국 혼자 오른다. 죽을 병만 아니면 다 괜찮다. 그러나 죽을병이어도 어쩔 수 없다. 언제든 어디서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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