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5
이번 편지의 제목은 “백년의 고독”이라는 소설에서 따왔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이 소설의 ‘작품 해설’을 보면 콜럼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가 1944년에 <집>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의 첫 문장을 썼다가 스스로 역량이 부족함을 깨닫고 무려 23년간 더 구상하고 18개월 동안 집필해서 쓴 작품이래. 나오자마자 세계인의 관심과 환호를 받았고 노벨 문학상도 받게 되었어. 오늘 편지의 한 축은 이 소설이고, 다른 한 축은 브라질의 후앙 기마랑스 로사(1908-1967)가 쓴 “제3의 강둑”이야. 이 단편소설은 단순한 이야기로 심오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어.
두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고독’이야. “백년의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이 마콘도라는 지역에서 7대에 걸쳐 살아가며 겪는 비극을 다룬 이야기이고, “제3의 강둑”은 어느 날 이유 없이 보트를 타고 강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평생 기다리는 가족의 이야기야. 대조하자면 “백년의 고독”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을 긴 호흡으로 유장하게 풀어냈고, “제3의 강둑”은 라틴 사람들이 겪었던 개인적, 실존적 고뇌를 강물과 배, 가족이라는 상징으로 형상화했다고 생각해.
“백년의 고독”에 나오는 사건들을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예컨대 소설에 나오는 바나나 회사 학살 사건은 실제로 유나이티드 프루트 회사(United Fruit Company) 사건이야. 이 회사가 콜럼비아를 포함한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 바나나 재배와 수출에 관한 계약을 맺고 노동자들을 착취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열악한 노동환경에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정부군이 그들을 총칼로 짓밟았어. 이런 사건들, 그러니까 부패한 정권이 오히려 외세의 편이 되어 자국민을 억압하는 사건들이 라틴 사람들의 밑바탕에 분노와 체념이라는 정서를 형성했을 거야.
그리고 정치적으로 양분되어 끝없이 내전에 휩싸이는 상황. 실제로 콜럼비아는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라고 불리는 시기(1948-1958) 동안 보수와 진보 정치 세력이 서로 폭력을 일삼는 장기 불안정 상태를 겪었는데 그나마도 미봉책으로 양쪽이 번갈아 권력을 나눠갖자는 식으로 해결되면서 정치 개혁은커녕 부패와 탐욕이 제도화되었지. 끝이 안 보이는 불안과 일상화된 폭력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체념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부조리로 느껴졌을 것 같아. “백년의 고독”에서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마콘도의 주민들이 지속적인 정치 폭력에 시달리고 또 부엔디아 가문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여러 차례 내전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이 암울한 폭력의 시대를 형상화했어.
“제3의 강둑”은 브라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어느 날 훌쩍 가족을 떠나서 이후 수십 년을 강 위에서 홀로 보트에서 생활하게 돼. 소설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고 남겨진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를 주로 그리는데, 예를 들어 딸이 결혼을 해도 가족들은 축하 잔치를 못 열어. 아버지의 부재, 심지어 그리 멀지 않은 저 강 어딘가에서 온갖 풍파를 다 겪어내고 있는 아버지의 고독이 느껴지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기 때문에 억지로 즐거운 척하며 잔치를 열 수는 없었지.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서 딸이 아버지에게 손주를 보여주려 강으로 가는 장면도 나오는데 강가에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며 손주를 꼭 좀 보시라고 절규하는 모습에서 남겨진 이들의 슬픔이 눈앞에 펼쳐져.
이 소설의 화자는 아들인데 이 아들은 아버지가 떠난 초기에는 몰래 강에 음식을 갖다 두기도 할 정도로 가족 중에서는 아버지와 심리적 유대가 강한 인물이야. 그래서 누나가 자식을 키운다며 도시로 떠나고 엄마도 늘그막에 딸과 함께 산다며 떠난 후에도 홀로 남아 아버지를 기다리지. 그런데 말이야. 소설의 끝부분에 놀라운 장면이 있어. 결혼도 못하고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며 산 아들이 강가에서 아버지에게 외치는데, 이제 그만 하시라고, 그 무거운 짐을 이제 자신이 지겠다고, 즉 아버지를 대신해서 고독을 감당하겠다고 소리치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드디어 그 말에 반응을 한 거야. 멀리서 손을 흔들며 아들에게 다가와. 그러자 아들은 너무 놀라 도망치게 돼. 그러면서 속으로는 도망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며 울부짖지. 그렇게 평생을 불러온 아버지가 다가오는데... 거부하다니. 그건 아마도 아버지가 지닌 고독한 삶의 무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가 아니었을까.
이 두 소설은 왜 이렇게 고독할까. 라틴 아메리카의 삶이 척박하기 때문일까. “백년의 고독”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고독을 심화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외세의 개입과 착취, 정치 갈등과 폭력, 가족의 붕괴와 같은 국제적, 국가적, 사회적 억압 상황에서 무력하게 삶을 견디는 태도일 테고, “제3의 강둑”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홀연히 떠나버린 것은 막막한 현실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임을 깨닫고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연으로 도피하는 선택이지 않았을까. 현실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이 소설들을 쓴 작가들은 아마도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서 창작을 시작했겠지. 특히 마르케스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표현기법을 개발하여 라틴 사람들의 정서를 오히려 더 정확히 묘사하는 데 성공했는데 라틴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서술보다 비현실적이고 마술적인 묘사가 더 적합했던 거야. 어쨌든 이 소설가들은 라틴 사람들의 마음에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은 사회적 정서를 ‘고독’이라는 형상으로 담아냈어. 그리고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이상을 지향하는 희망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관점을 넓혀보자.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 각계에서 노력했어. 먼저 종교계에서는 해방 신학 운동(1960-70년대)이 일어났지. 혁명적 사회 변혁의 종교사상적 기반으로서 해방 신학이 탄생하게 된 거야.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면 지금 이렇게 억압받으며 죽어가는 민중들을 두고만 보지 않으실 테니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겠지.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변혁적 사회운동을 해야만 해.
교육계에서는 파울로 프레이리를 빼놓을 수 없어. 그는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라는 책을 1968년에 썼고 ‘비판적 의식화’와 ‘대화적 교육’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교육 운동을 펼쳐 나갔어. 글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안다는 것이고 곧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할 안목을 갖게 된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알기 전과 후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 부조리한 체제를 두고만 볼 수 없겠지. 그래서 교육이 곧 혁명이야.
학계에서는 ‘종속이론’이 대두되는데, ‘종속이론’은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사회학자들이 거대한 세계경제체제 안에서 개발도상국의 상대적 위치를 이론화한 작업이지. 중심(선진국)에 의해 밀려나 주변(개발도상국)에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착취되는 구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종속 상태를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모순이 심화돼. 이런 이론을 배운 피가 뜨거운 청년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위에 도달하게 되겠어.
20대에 “백년의 고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생소했던 라틴 문학이었고 그저 제목이 매력적이어서 고른 이유가 컸지만 막상 읽고 나니 라틴의 문학은 서구 유럽이나 아시아권 문학과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더구나. 남미는 정열의 대륙이라는 둥, 폭력으로 물든 땅이라는 둥 이런저런 상투적인 수식어 이상으로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는 미지의 땅이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서 그들의 깊은 슬픔을 엿본 것 같았어. 스무살에 정외과에서 칠레 아옌데 정권이 미국 CIA의 공작에 의해 무너졌던 사례를 배우며 ‘라틴 아메리카는 정말 미국의 뒷마당이구나’ 실감했었고, 아르헨티나가 한때 경제 대국이었지만 지금은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경제발전은 꿈도 못 꾸고 일상의 평화도 유지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의 발전, 정권의 정통성, 사회의 민주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반면교사로 삼을 뿐이었어. 그리고 ‘에비타’라는 영화를 보면서 아르헨티나의 20세기 초 정치상황을 조금 알게 되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영화와 체 게바라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쿠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에 대해 조금씩 배울 뿐이었지. 하지만 이 모든 지식들은 단편적인 사실로 남았고 라틴 아메리카를 종합적으로 이해시켜주지는 못했어. 그러다가 “백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화려한 축제와 열광적인 축구 응원 속에 가려진 그들의 눈물을 비로소 그들의 언어로 접하게 되었던 것 같아.
아홉 번째 편지, ‘탈식민주의 문학과 오리엔탈리즘’ 말미에 ‘영미 문학만 잔뜩 읽고 양념처럼 아프리카 문학 한두 편 읽은 다음 세계 문학을 다 아는 척하지 않는 태도도 중요해.’라고 말했는데 실은 그게 바로 내 이야기란다. 라틴 문학 조금, 아프리카 문학 조금 읽고서 균형 잡힌 독서를 한답시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반성이야. “백년의 고독” 다음에 읽은 정확히 말하면 <EBS 라디오문학관>의 오디오북으로 들은 “제3의 강둑”이 ‘고독’이라는 라틴의 정서를 다시 확인시켜주었고 그래서 나의 문학 편식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라틴 문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이 소설들을 소개하는 건 러시아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고, 중국의 루쉰이 그랬고, 우리의 곽재구가 그랬듯이 문학가들은 어디에서나 그 사회의 아픔에 공감하고 고통을 직시하면서 아름답고 정제된 언어로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걸, 그것이 라틴 아메리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결국 이 작품들을 읽으며 우리는 ‘집단 성찰’이라는 걸 하게 되고 ‘사회적 공감 능력’을 기르게 되는데 개인 수준의 성찰과 공감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해야 할 평생의 숙제 같은 거라면 집단 성찰과 사회적 공감 능력은 우리가 함께 겪은 어떤 시간에 대해 도대체 그때 그 일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
집단 기억의 안내자. 문학가들이 맡을 수 있는 사명이지. ‘우리 그때 그랬어요’라고 재밌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때 우리 참 힘들었어요, 그런 점은 참 잘못이에요, 그 사람들을 기억해요’라고 권유하는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어. 이것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며 이런 공동 성찰, 집단 성찰이 잘 되는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스스로 만들 수가 있어. 독일이 2차 대전 때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에 대한 진지한 집단적 반성을 통해 이제는 민주시민교육의 모범 국가, 수준 높은 정치제도와 문화를 향유하는 국가로 성장하지 않았니.
지금의 라틴 아메리카는 어떤지... 백년의 고독에서 벗어났는지... 지금의 라틴 문학가들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혹시 알게 되면 알려주면 고맙겠어.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 다음 주에는 황석영의 작품 세 편을 바탕으로 그가 그린 혁명적 민중이라는 이미지를 탐구해보자.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 안녕!
- 멕시코에서 일하고 있는 중학교 동창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요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