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래고래 Jul 06. 2024

루쉰과 마오쩌둥

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4

지난 편지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가 어려운 시절에 쓴 빛나는 작품을 이야기했듯이 이번 편지에서는 루쉰이 중국의 혼란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당시 중국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의 사회주의 정권, 공산당의 성립과 정립 과정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도 간략히 다뤄보자.      


대학 1년 때, 그러니까 나이 열아홉에 서울로 올라와 처음 경험한 일들이 참 많았고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세상 공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때 내 눈을 틔워준 고마운 책들이 있었어. 당시는 늘 용돈이 부족했기에 책은 당연히 빌려보는 거였는데 한번 빌려 보고서 너무 좋아서 새 책을 사서 다시 읽은 책들이 있었거든. 바로 그 책 중에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2”(조너선 D. 스펜스, 1998, 이산 출판사)가 있어.      


아직 중국에 대한 경계가 풀리기 전인 90년대 말, 나로서도 중국의 역사는 공자, 맹자, 명나라, 청나라 정도였던 그때, 더욱이 사회주의에 대한 공부가 암암리에 금지되던 그때 이 책을 만났는데, 미국 역사학자가 쓴 이 책은 청나라 시작부터 현대의 중국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규모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어. 인물 한명 한명의 내밀한 세계부터 국제 정세의 급박한 변화까지 어쩌면 이렇게 맛깔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새삼 역사학자의 해박한 지식과 능숙한 입담에 놀랐었지.      


그 책에서 처음 루쉰을 알게 되었어.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전도유망한 청년. 그러다 인간이 아닌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고 문학가, 저술가, 사회운동가로 전향한 인물. “아Q정전”의 저자, 촌철살인의 대가로서 그의 모습을 배웠고, 역사적 혼란기에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생하게 증거하는 인물로 내게 각인되었어.      


1904년, 러일 전쟁이 시작한 그해에 루쉰은 일본의 대학에서 의학 공부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전쟁 영상 중에 일본 군인이 포로로 잡힌 중국인을 총살하는 영상을 일본인 학생들과 같이 보게 되었어. 그걸 보면서 환호하는 일본 학생들과 그 속의 루쉰. 전쟁 중인 고국에 돌아가 병사들을 치료해주겠다던 순수한 열정은 나라가 처한 암울한 상황과 사람 한두 명 고쳐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냉정한 깨달음 앞에서 식어버렸지. 그래서 인문학 공부를 시작해. 사상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걸 직감했나봐.      


루쉰의 가족들은 전통 방식으로 그를 결혼시키기 위해 엄마가 아프다는 거짓 소식을 보내고, 그에 속아 귀국한 루쉰은 혼인을 하고 그때부터 중국에서 일하게 되는데, 마침 신해혁명(1911-1912, 삼민주의를 제창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정부 수립)이 일어났고 루쉰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열망에 열심히 참여했지. 연설대를 조직하고, 신문에 글도 쓰고 했었지만 결국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아. 이후 루쉰은 절망에 빠져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데 신문화 운동(1917-1921, 신지식인 중심의 계몽 운동)에 동참하기를 권하는 친구와 나눈 대화가 유명해. 쇠 방에 잠든 사람에 대한 비유야.      


사방이 온통 철벽으로 꽁꽁 갇힌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 상황을 자연스레 생각하면서 천천히 죽어가는 운명에 체념할 때, 한두 명 깨인 사람이 있어서 이곳이 철벽 안이라고, 우린 나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루쉰의 주장. 하지만 일말의 희망은 언제나 있으며 그 한두 명이 철벽을 세게 부딪히고 혹시나 있을 균열을 찾아내고 그래서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지 않느냐는 친구의 반론. 그리고 무엇보다 ‘식인食人을 하지 않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인 당위가 루쉰을 움직였어.    

  

“광인일기” 마지막 부분에 “사람을 잡아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혹 아직도 있을는지? 아이들을 구해야지…….”라는 대목이 있어. 오랜 시간 유교라는 이념으로 철저하게 길들여진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연스레 굳어져 버린 사회적 습관. 그것이 모두를 옴짝달싹하게 못하는 쇠방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려.      

그의 대표작인 “아Q정전”을 잠깐 이야기해볼까. 아Q는 마을에서 누구에게나 놀림 받고 천대 받는 처지였지만 그 스스로는 세상의 중심이며 자기가 잘났다고 믿는 사람이지. 남에게 두들겨 맞아도 그만의 독특한 정신승리법을 발동하여 꼬장꼬장 자존심을 지키는 인물이야.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행태가 바로 당시 중국 사회에 만연한 노예 근성을 꼬집는 풍자였지.     


당시 중국은 일본에 의해 서구 열강에 의해 야금야금 잡아 먹히는 상황이었는데 루쉰이 볼 때는 중국인들이 서로를 잡아 먹는 처지가 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거지. 그걸 고치지 않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중국의 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 새로운 체제를 제안하는 시대. 이때 나타난 두 사람의 지도자가 바로 마오쩌둥과 장제스야. 마오는 공산당을 장제스는 국민당을 이끌었지. 사실 초기에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힘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장제스에 기울었어. 장제스는 쑨원이 세운 국민당, 전국적 기반이 확고한 정당의 지도자이고 마오는 이제 막 시작하는 공산당의 지도자였으니까. 그래서 압도적인 힘에 밀려 공산당이 짓눌릴 수도 있었지만 공산당으로서는 다행으로 각지에서 발호하는 군벌들과 외세의 위세가 너무 강하니까 국민당과 공산당이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라 힘을 합쳐서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어. 그래서 제1, 2차 국공합작이 이뤄져. 그러면서 공산당은 소비에트를 조직하면서 세력을 확장할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되었어.  

      

그런데 결국은 마오가 장제스를 이겨. 장제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작은 섬으로 쫓겨가 대만을 세우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마오가 현실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엘리트 출신이 아닌 점도 유리했고... 지도자 초기 시절 쫓겨 다니던 때에 마오는 그 마을을 속속들이 알려고 노력했거든. 이 집의 빚은 얼마인지, 어쩌다 빚을 지게 되었는지, 팔려간 딸은 누구네 집에 있는지, 돼지는 몇 마리인지... 이런 사소하고 구체적인 삶의 양상을 일일이 파악하고 다니면서 결국 중국 인민을 그들의 시각으로 이해하게 된 거겠지. 장제스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승승장구하며 최고 권력자가 된 길과는 대조돼. 그때는 1917년에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를 중국 공산당이 받고 있었는데 고고하고 추상적인 사회주의 혁명 이론과 눈앞에 펼쳐진 가난한 인민의 처지가 마오의 머리 속에서 융합되면서 결국 중국식 사회주의를 주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뿌리내린 사회주의 이론으로서 국민당과 장제스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서 새 나라를 세우는 저력이 되었겠지. 


하지만 49년에 그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난 다음에는 점차 탐욕스런 독재자로 변해갔어. 책을 읽은 지 20여 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기억나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린뱌오에 관한 일이야. 그는 중국 공산당 초기부터 국방부 장관과 같은 역할을 했고 중국 수립 이후에도 권력의 정상에 있었으며 오랜 시간 중국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1969년에 열린 당대회에서 그는 공식적으로 ‘변절자, 배신자’로 선포되고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문화혁명으로 인해 생긴 대규모 사회 혼란, 홍위병의 극심한 폭력, 그리고 너무 급진적인 홍위병을 무력으로 제압한 인민해방군, 그 군대의 수장인 린뱌오. 마오는 린뱌오의 개인적 야심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그를 죽이게 되었거든.      


루쉰은 이런 공산당의 생리를 선견지명으로 미리 알아챘던 걸까? 그의 말년에 공산당에 입당하라는 권유가 참 많았는데도 물리치고 약속된 부와 권세를 거부했어. 혹시 백석 시인이 북한 공산당에게 받은 수모에 대해, 창작을 억압받았던 슬픈 역사에 대해 여덟 번째 편지에서 한 이야기를 기억하니? 경직된 공산당의 이념에 꼼짝하지 못했지만 문학은 하고 싶어서 아동 문학을, 어린이를 위한 시를 썼는데 그 시마저도 당성이 부족하고 사회주의를 철저히 주입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의 공식적인 비판을 받았잖아. 아마 루쉰은 그런 경직성을 누구보다 혐오했기에 아마도 변해 버린 마오에 대해, 그의 지도 체제에 대해 새로운 쇠방이 등장했다고 비판하지 않았을까.      


쇠방의 비유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한 동굴의 비유와 비슷해. 세상이 온통 동굴이거나 쇠방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상이 아니어서 밖에 나가자고, 쇠방을 탈출하자고 외치는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되지. 물론 미친 사람이라고 다 순수한 이상을 지향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쇠방에 갇혀 정신줄을 놓아서 미치기도 해. 그러니까 숭고한 광기와 추악한 광기를 구별할 필요가 있겠지.   

   

루쉰이 청년기에 의사로서 꿈을 접고 문예에 희망을 걸었을 때,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자만심에 빠져 중국 인민 전체를, 아시아 국가 전체를 노예 취급하던 그때, 정작 중국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서로를 노예 취급하느라 바빠 군벌에, 서구에, 일본에 온통 착취를 당하고 있으니... 그런 동포들을 바라보면서 루쉰은 자기가 쥔 한 자루 붓에 희망을 걸었던 걸까. 문필가로서 아무리 명문을 휘날린다 해도 읽지 않으면 그만이고 무시하면 그만인 글 몇 조각에 중국의 운명을 바꿀 야심을 품었던 걸까.      


루쉰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어. 문학가보다는 사회개혁가로 더 유명한 듯하네. 그의 글은 평생 풍자와 비판으로 일관되었지만 그래서 그 글은 강고한 쇠방에 한줄 두줄 금을 내는 시퍼런 칼날로 남게 되었나 봐.      


이만 마무리하자. 다음 주에는 라틴아메리카로 가볼게.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안녕!    

         

- “현대 중국을 찾아서”가 소설보다 재밌던 스무살을 기억하며

이전 13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