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3
러시아의 대문호. 러시아를 넘어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두 작가. 묘하게 대조되어 라이벌처럼 보이는 두 사람. 오늘은 두 사람의 문학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내가 ‘러시아 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대학에서 들었을 때 푸쉬킨이니 고리키니 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매력적이었지만 두 사람의 문학 세계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졌기에 온통 관심이 거기에 쏠렸어. 그런데 둘 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 쪽에 더 매력을 느꼈고 그래서인지 톨스토이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이 읽었지. 편식한 셈이야.
왜 도스토예프스키에 끌렸을까. “지하 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흔히 말하는 정상이 아니야. 심사가 뒤틀려 있다고 해야 하나?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럽고 괴팍하며 나쁜 짓도 서슴없이 할뿐더러 체제를 뒤엎으려는 망상에 빠지기도 하지.
물론 톨스토이의 작품에도 다양한 인물이 묘사되어 있어서 이상한 놈, 나쁜 놈도 많이 나오지만 왠지 그들은 교화되고 순화되어 종교적인 깨달음의 방향으로 인도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 마치 거대한 올바름을 작가가 미리 정해 놓고 거기로 독자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수많은 인물들의 실수, 반목, 방탕, 나태, 살인과 같은 여러 굴곡을 차근차근 배치해 놓은 듯한 인상이 들었어.
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그로 인한 죄악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런 인간이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야. 물론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삼형제 중 막내인 알료사는 그런 경지를 초월한 순수하고 신성한 성품의 소유자이고 그래서 두 형들과 아버지의 막장 인생을 부드럽게 교화하는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런 인물은 상당히 드물고 예외적이지.
20대 초반의 나는 세상을 알고 싶고 다양한 인물을 만나고 싶으며 특히 이상스레 보이는 해석이 불가능한 특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좋은 공부가 될 것을 직감했나 봐. 그때의 고민이 사회의 부조리, 사회악, 구조적인 악, 인간의 사악한 본성, 정권의 부정비리, 권력자의 탐욕과 같은 주제들이었거든.
사회문제의 원인을 설명하는 두 편의 주장을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인간은 죄가 없다, 사회구조 문제의 해결이 먼저다’라고 믿는 편과 ‘결국 인간의 악한 본성이 문제다’라고 믿는 편이 있어. 나는 둘 중에서 전자 쪽이라 사회 운동, 제도 개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후자의 주장도 설득력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상반되는 주장, 보수니 진보니, 이상이니 현실이니, 개인이니 사회니 하는 이분법에서 우리는 보통 어느 한 편을 선호하게 되지만 사실 반대편의 주장도 꽤 설득력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오지. 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개인보다는 사회가 문제라고 생각했고 누구든 이해 못할 사람은 없다는 식의 선한 본성론을 지지했지만 그게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고 그 예감을 확인해 준 것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몇 편에서 인상적인 인물들을 살펴보자. “지하 생활자의 수기”라는 소설의 첫 문장은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라는 유명한 독백으로 시작하고 이런 구절도 나오지. ‘나는 선善이라든가 그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깊숙이 자기 내부의 흙탕 속에 빠져들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죄와 벌”에 나오는 가난하고 사색적인 학생 라스콜니코프는 스스로 선택받은 강자라고 생각하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악인이라고 확신하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여버려. 정의를 위해 사회의 법과 도덕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지. 이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스메르자코프는 집시 여인이 집안의 아버지인 표도르의 집안에 넘어와서 낳은 아들이야. 표도르의 사생아로 그려지고 있어. 이 인물은 간질병이 있고 비열하고 영리하여 권모술수에 능하지. 드미트리, 정실 자손인 이반, 알료사 세 형제를 시기하면서 동시에 둘째 이반을 동경하고 아버지 표도르에 대해 복수를 꿈꾸는... 끝으로 “악령”에는 1860년대 후반의 러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을 모델로 하는 인물들이 나와. 점조직으로 이뤄져서 윗선과 유일하게 선이 닿는 누군가가 결국 자기가 속았다는 걸 알면서 절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신과 같은 비밀 점조직이 러시아 전체에 퍼져 있어서 어느 순간 혁명이 활활 타오르리라는 허황된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었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인간들이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어. 만약 네가 군대나 직장에서 이런 인간형을 만난다면 어떨 것 같니? 그저 관심을 끊어버리는 방법밖에는 없을까? 아니면 이들과도 어울려 사는 법을 찾아야 할까?
그런데 선과 악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아. 사회구조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지.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아무리 도덕적인 인간이라도 비도덕적 체계 속에서는 집단 논리에 휘둘려 비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어. 그런데 책 제목에 대한 풍자로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라. “비도덕적 인간과 더 비도덕적 사회”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촌철살인. 그 한마디가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만큼이나 큰 깨달음을 주었어. 우리는 함께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덕적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고, 그런 어려움을 제도적인 장치로 보완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구조적인 악을 생산하기도 하지.
톨스토이 이야기도 좀 해보자. 지난 편지에서 소개한 임헌영 문학 평론가는 누군가 자기더러 세상의 모든 소설 중에서 한 권만 추천해 달라면 주저 없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권한다고 하더라. 인간사, 사회사, 세계사를 두루 아우르는 소설계의 종합선물세트니까. 소설에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공격하려 보로지노로 행군하는 도중에 라브루시카라는 러시아 농노를 잡아다가 직접 심문하는 장면이 나와. 이 사람은 직감으로 저 이가 나폴레옹임을 알았지만 짐짓 모른체하다가 ‘나폴레옹은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놀라고 겁에 질린 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지. 그는 연기에 성공하고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서 무사히 풀려나. 심지어 누가 이길 것 같냐는 질문에 나폴레옹이 위대하니까 당장 전쟁을 하면 이기겠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전세를 예상하기 어렵다는 정확하고 뛰어난 예측을 서슴없이 하기도 하는데 프랑스 통역사가 알아서 몸을 사리며 끝부분 통역을 얼버무렸고 그래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길 거라는 앞부분만 듣게 되었지. 아무튼 이 농노가 보여준 지혜로움이 톨스토이가 믿었던 민중의 지혜이고 곧 민중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민중사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임헌영 평론가는 설명하고 있어.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 임헌영, 역사비평사, p. 71)
톨스토이는 1828년에 태어나 1910년에 돌아가셨고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1881년이니까 두 사람 모두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를 경험한 인물이야. 그런데 러시아는 그 시기 동안 황제 국가라는 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사회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구체제의 모순을 쌓아가고 있었어. 그리고 그 모순이 터진 것이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이야. 1904∼1905년에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일본과 벌인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는데 당시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일본 빼고는 없었을 거야. 일본은 단숨에 정복 국가로서 제국주의 국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어. 한편 러시아는 그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졌고 그래서 굶주린 러시아 백성들이 황제에게 자비를 구하러 궁전으로 행진했는데 황제의 군대는 그들에게 무자비한 총격을 가했던 거야. 그것이 결국 반체제 시위로 번지게 되고 이에 황제는 급한 불을 끄느라 입헌 군주제(헌법에 입각하여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체제)와 의회제도 채택을 약속하지만 이후로 계급 갈등은 더 심해지고 설상가상으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 터지면서 러시아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져. 결국 1917년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면서 구체제를 무너뜨리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후반에 작가 특유의 날카롭고 민감한 더듬이로 러시아의 사회 모순과 체제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겠지.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모두 어지러이 흔들리고 그래서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종말적인 예감도 들었을 거야.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제 살길을 찾기 위해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인류 공동선을 위해서 아니면 영웅주의에 빠져서 난국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의지를 발동시키기 마련이고 두 작가 역시 소설에서 구원의 길, 구원자의 형상을 모색하고 있어.
언젠가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면서 절망과 체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어. 태어나자마자 일제시대라면 어떨까. 그것도 하층계급의 자녀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애초에 없어. 독립운동에 투신하려해도 압도적인 화력의, 심지어 러시아 제국도 이겨버린 일본 제국에 맞서기에는 내 빈 주먹이 너무 초라하겠지. 그런 암울한 환경,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일제 강점 상황에서 그래도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고 그렇기에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보광당’을 창설하는 혈기 왕성한 청년들도 나오는 거겠지.
어쩌면 러시아가 가장 깊은 어둠에 빠져 있었을 19세기 후반에 가장 빛나는 작품을 써내려간 두 명의 대문호가 있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지네. 다음 편지에서는 중국이 가장 힘들었을 때 역시나 빛나는 작품을 써 준 루쉰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안녕!
- ‘도스토옙스키’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많았던 20여 년 전 도서관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