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2
문학평론이라...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야말로 자타공인 책벌레고 책을 읽지 않으면 안되는 숙명을 지닌 사람이지. 어린 시절부터 책에 강한 이끌림을 느꼈겠고 여러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비교하는 시각도 생겼겠지. 그리고 비교를 넘어서 무언가 큰 흐름이나 보편적인 관점 같은 것이 생기자 비로소 그 많은 작품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해보려는 의지가 발동되었을 거야.
오늘 소개할 두 사람은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자 평론가 중에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진 사람인 듯해. 두 분 모두 많은 책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임헌영의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2020, 소명출판)와 김현의 유고 평론집, “말들의 풍경”(1992,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글을 중심으로 이야기할게.
먼저 임헌영 선생의 이 책은 제목부터 신선하지. ‘통매’라는 말을 검색해보니 통렬히 꾸짖는다는 뜻이더구나. 소설로 정치 현실을 준엄하고 매섭게 야단친 그런 소설만을 모아서 평론집을 냈다는데 본인이 말하는 책을 펴내는 소회를 들어볼까.
어차피 문학평론은 열심인 인문학 독자들조차도 사돈네 쉰 떡 보듯 하던 터라 대중적인 호기심에 불꽃을 확 당길 화두가 될 문학평론집이란 신기루일 뿐이다. 언감생심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정치를 질타하는 문학만을 다뤄보자는 만용을 부리는 건 노망의 징조인가 싶지만 에라, 늘그막에 이런 객기 한 번쯤 부려보자고 추려본 것이 이 평론집이 되었다. (책머리에, pp. 3-4)
이 문장을 읽으면서 평생 글을 다뤄온 사람이 도달한 글을 갖고 노는 것 같은 원숙한 경지를 느꼈어. 무심하게 툭툭 내뱉듯이 말하면서도 알맹이가 그득 차 있는 그런 문장, 구어체와 문어체가 절묘한 지점에서 만나 있는 문장,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느껴지는 문장이지 않니?
어쨌든 이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을 읽는 사람이 워낙 줄어든 풍토에서 그나마 열심인 독자들에게도 문학평론은 찬밥 신세인 걸 알 수 있지. 바로 이 지점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구나. 평론은 기본적으로 원작에 대한 누구의 평가이자 해석인데, 원작을 읽을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 굳이 평론집을 읽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는 거야. 더구나 주체적인 성향인 사람들은 내가 내 식대로 이해하면 되지 왜 다른 사람의 해석에 연연하느냐는 뾰족한 말도 할 법하지.
그러나 문학평론가는 책 읽기가 직업인 사람들이고 그런 면에서 독서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경지든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의 작업을 예술적이라고 느끼듯이 읽으면서 감탄이 나오는 평론이 있어. 그리고 그런 평론을 통해서 내가 무심코 읽어 넘긴 그 문학작품의 진가, 진면목을 발견하는 ‘감식안’을 얻게 되기도 해. 성실한 평론가는 기본적으로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은 물론 작가의 인터뷰나 사소한 흔적까지도 추적하고 또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상과 문학의 흐름까지도 꿰뚫으면서 작가의 개성은 물론 시대 보편성의 관점에서 작품의 가치를 어울리게 해석하는 사람이야.
임헌영이 쓴 박완서 작가에 대한 글을 볼까. 사실 네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박경리와 박완서’에서 ‘박경리 선생의 작품은 일제 강점기를 지내는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한데 모아 당시의 시대 감정, 시대 정서를 추출해낸다면 박완서 선생의 작품은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한 인간이 그 시대를 살아가며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의 다양한 폭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면서 나름대로 두 거장의 서술 방식의 차이를 비교한 적이 있어. 그런데 임헌영은 박완서의 작품과 그가 남긴 인터뷰, 그리고 그 자녀들의 발언까지도 섭렵하여 박완서의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그리는데, 그의 문학은 기본적으로 ‘후일담 문학’이며 특히 한국전쟁의 경험을 평생 풀어낸 작가라는 점이 분석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박완서는 당시 민중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온갖 허위와 위선을 낱낱이 고발하는 작품을 써왔는데 그 특유의 양비론, 이편도 저편도 다 나쁘다는 논리를 이렇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작가도 드물다고 할 수 있지. 임헌영이 발견한 숨겨진 보물 같은 박완서 소설의 한 토막과 그에 대한 평론을 같이 보자.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은 전쟁 중 마을 여인들을 보호하고자 젊은 여성으로 위장한 할머니가 미군의 섹스 상대로 끌려갔다가 그 정체가 탄로나 먹을거리를 잔뜩 얻어 무사히 돌아온 사건을 풍자적으로 그린 소설인데,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오고 또 먹을 것까지 잔뜩 얻어온 건 그놈들이 양놈들이었기 망정이다. 아, 왜놈만 같아봐라, 나한테 속은 걸 안 즉시로 쏴 죽였을 걸. 암 그 독종들이야 쏴죽이고 말고, 왜놈이 아니고 소련 놈만 같아봐라. 아마 늙고 젊고 안 가리고 들이덤벼 욕을 봤을 걸. 쏴죽일 거 없이 제놈들한테 깔려 죽을 때까지 욕을 봤을 게다.”
노파도 마을 여자들도 한 번도 이 나라 밖을 나가 본 적도 없고, 마을에 살면서도 양놈이니 왜놈이니 소련놈이니를 직접 사귀거나 대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사건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노파는 그 정도의 세계관(?)을 자신만만하게 피력했고, 듣는 사람 역시 추호의 이의도 없었다.
이것이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이다. 아니, 박완서가 결산한 한국전쟁의 계산서이다.
아빠가 너에게 전한 박완서는 개인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그래서 숲과 나무의 비유 중에서 나무에 해당한다는 다소 투박한 이분법이었는데 임헌영은 박완서가 평생 한국전쟁에서 경험한 부조리를 고발하고 당시 사람들의 절실한 토로를 대변하는 일에 몰두했음을 알았기에 마치 작가에 빙의하여 어느 대목에서 작가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거지.
또한 그가 한국 정치를 통렬히 꾸짖는 소설을 귀하게 여기고 요즘 세태에 더욱 가치가 높다는 생각에서 그런 평론만을 모아 책을 내려는 마음을 먹은 것도 대단해 보이는구나. 특히 이 책의 2부는 이병주에 관한 글만 모았는데 첫 편지에서 소개했듯이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해서 재밌게 읽었어. 얘기가 좀 엇나가지만 이병주만큼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을 잘 하는 작가도 없었다는 게 임헌영의 평가야.
이제 김현으로 넘어가자. 김현은 1942년생이고 90년에 생을 마감하셨으니 비교적 단명이구나. 하지만 그 짧은 생애에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제목만 봐도 뭔가 두근거리며 읽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대학 재학 중이던 62년에 비평활동을 시작하여 “존재와 언어”(1974), “문학과 유토피아”(1980),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1984), “책읽기의 괴로움”(1984), “분석과 해석”(1988), “말들의 풍경”(1992)이라는 평론집을 남겼으며, 그 외에도 “한국문학사”(1973), “한국 문학의 위상”(1977),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1987), “시칠리아의 암소 – 미쉘 푸코 연구”(1990)에 이르는 작품을 남긴 다작가였어.
그의 평론은 크게 보아 4・19 세대 문학에 대한 평론과 1980년 5・18 이후의 문학에 대한 평론으로 나눠볼 수 있어. 4・19가 우리 역사에서 거의 처음 맛보는 민중의 목소리가 반영된 그런 승리였기에 그 감격이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이후 2공화국이 실험한 의회책임제라는 민주주의 제도가 본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어그러지면서 패배와 좌절이 시대를 압도했었지. 헌데 그 시절의 문학은 어땠을까. 외국 문학을 수입하는 데 급급하고 외국 것이면 무턱대고 찬양하면서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풍토였다고 해.
김현의 몇 년 후배이며 그와 함께 평론가로 성장한 성민엽 평론가의 “문학의 숲으로”(문학과지성사)라는 책에서 한 구절 옮긴다.
“썩지 않기 위해 새로운 것만 구하다가 오히려 더 악취를 내풍기게”하는 그런 풍토인 것이다. 이 풍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솔직히 한국 문화의 지저분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고는 한국 문화의 전통적인 기반을 과거의 문화 작품 속에서 추출해내는 오랜 어려운 작업이 필요하다. ... ” 이 작업은 곧 ‘문화의 고고학’이라는 이름을 얻는데, 이후로 김현은 그 스스로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성실하게 이 작업을 수행해나간다.
아홉 번째 편지, ‘탈식민주의 문학과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과 비서양이라는 구도 자체를 넘어서서 어떤 작품의 진가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잣대가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김현이 바로 그 작업을 오래 전부터 해왔구나. 우선 한국 문화의 지저분함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처지를 객관화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고고하게 빛나는 문화적, 문학적 성취들을 발굴하여 과도한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게 해주었지. 또한 공정한 잣대를 튼튼한 이론에 기반을 두고 만들기 위해서 프로이트, 사르트르, 바슐라르, 마르쿠제, 아도르노, 바르트, 제네바 학파, 지라르, 푸코와 같은 일급 학자들의 이론을 부단히 받아들였다고 해.
그의 유고 평론집 “말들의 풍경”에서 ‘고난의 시학 : 한국시의 유형학’이라는 글을 보자. 그에 따르면 한국의 시는 일제 시대의 ‘부끄러움의 시학’에서 4.19 이후에 ‘고난의 시학’으로 변모했다고 해. 부끄러움의 시학을 잘 보여주는 이는 윤동주. 그의 시엔 유독 부끄러움의 정서가 많은데, 그 유명한 “서시”에서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며 몸부림치지만 그 역시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며 한탄하고 있어.
이어지는 김현의 평론.
식민지 시대는 그 부끄러움도 느끼기 힘든 시대이다. 그 시대에,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가짜의 삶, 자기 정체성을 잃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으며, 그 시대에 부끄러움의 시학은 충분히 그 역사적 자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고,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끄러움의 시학이 보여준 절실한 실존적 떨림은 어느 정도 그 절실성을 잃고 시적 수사의 일부분이 된다. 그것은 타기할 만한 일도 상찬할 만한 일도 아니다. 모든 시적 움직임은 결국 시적 수사의 한 부분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의 시학이 시적 수사의 한 부분이 되어, 남북 분단・민족 상잔의 가짜 이데올로기 전쟁, 계속되는 쿠데타 …… 등의 현실을 드러내는 데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자, 그것을 극복한 새로운 시학이 얼굴을 내민다. 그 시학을 준비한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지만, 그 시학은 거기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여러 양태의 고난・핍박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다양한 꽃과 열매를 피우고 맺는다. 그 시학의 이름이 고난의 시학이다. (“말들의 풍경”, pp. 137-138)
고난의 시학의 기본 구조는 상징주의 시학의 구조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물론 같지는 않다. 동양의 상징주의의 기본 도식은 시인을 귀양온 신선이라고 보는 도식이며, 서양의 상징주의의 기본 도식은 시인을 대중에게 버림받은 천재로 보는 도식이다. 이백과 보들레르로 대표될 수 있을 그 도식은, 시인은 고난의 땅에 살고 있다는 고난의 시학의 기본 도식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고난의 시학의 시인들에겐, 이백의 천상의 세계나, 보들레르의 예술의 세계처럼 되돌아갈 세계가 없다. ... 시인은, 이 세상에 온 신선이나, 대중들과 다른 천재가 아니라, 이 땅에서 고난의 대열에 서 있는, 아니 이 땅의 고난 그 자체인 일반 사람들과 같다. (“말들의 풍경”, p. 136)
일제 시대부터 4・19 세대에 이르는 1930~40년대부터 1960~70년대 한국 시의 흐름을 ‘부끄러움 시학에서 고난의 시학으로’라는 명제로 유형화하는 김현의 솜씨는 탄복할 만하구나.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김현이 선물해준 감식안을 안경 삼아 그 많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변주를 마치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듯,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되겠지.
이어서 김현이 5・18 이후의 문학에 대해 평론한 부분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만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이기로 하자. 아무리 좋은 말도 길어지면 안 좋으니까. 김현이 우리의 일곱 번째 편지에서 다룬 곽재구 시인을 평하면서 ‘추상적 정열에서 구체적 사랑으로 – 곽재구의 시적 확대’라는 글을 썼고, 거기서 그의 시가 1집에서는 추상적 정열에 머물렀으나 2집에서 구체적 사랑으로 확대되어 가는 양상을 분석한 대목이 재미있는데 역시 그 이야기도 나중으로 남겨 두자.
책을 좋아하는 너에게, 책읽기가 직업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내가 아는 훌륭한 평론가 두 사람의 작품을 소개했어. 세상 사람들은 참 다양하게 살아가는데 그중에서도 문학평론가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탐닉하던 책을 평생 읽는 복을 타고난 사람이구나. 문득 김현의 책 중에 “책읽기의 괴로움”이란 책이 궁금해지네.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안녕!
- 문학을 보는 깊고 넓은 관점을 얻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