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1
헤르만 헤세. 너의 책장에서 “싯다르타”를 발견한 이후 널 떠올릴 때마다 가끔 연상되는 인물. 나도 어려서 그를 좋아했지만 다른 작가들보다 특별히 더 좋지는 않았는데 너와 나의 공통분모라고 생각하니 점점 헤세에 대해 더 관심이 생기게 되었어. 그러다 2년 전 여름에 아빠의 특별 휴가로 혼자서 천리포 수목원에서 이틀 머물렀을 때 오래도록 기다렸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으면서 이젠 나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되었지. 그래서 작품을 넘어서 작가의 인생에 대한 탐구도 하고 싶어졌는데 이 편지는 그 탐구의 중간 보고서야.
지난 편지에서 소개했는데,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을 기억하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노동’을 통해, 인간 그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작업’을 통해,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행위’를 통해 우리는 인간답게 살 기본적인 조건을 마련한다고 했었지.
헤세의 삶을 보니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삶이었고 그래서 더욱 너에게 소개해주고 싶었어. 삶이 결코 평탄치 않고 오히려 악조건이 가득해 보이기까지 하는데도 그는 용케도 그 많은 작품을 남기며 동시대인들과 후속 세대에게까지 감동과 위로를 주는 인물로 남았구나.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위기가 있었는데 어렵게 입학한 신학교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자퇴를 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권총 자살 시도 등으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요양도 했단다. 퇴원 후, 서점 직원으로 일을 시작하고 습작과 독서에 열중해서 20대 초중반에는 어엿한 작가가 되었고 결혼을 하여 세 아들도 낳았지만, 이른 성공이 가져다준 안락과 평온이 오히려 그의 방랑자 기질을 자극했을까. 그는 자주 장기 여행을 떠나 가정에 소홀하고 무심한 사람이 되어 버린단다. 아내와도 아들들과도 불화를 겪다가 1923년에 이혼을 하고, 두 번째 결혼도 실패하여 다시 외로워하다가 세 번째 결혼에서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어.
조국 독일은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온 나라를 광신적 애국주의로 몰아갔으며 1918년 패전 후에도 반성은커녕 반유대주의를 매개로 결국 히틀러가 등장할 토대를 만들지. 결국 1939년 2차 대전도 일으켜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하게 돼. 이런 조국을 가진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주위엔 온통 그를 비난하거나 회유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하니까.
이런 그에게도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바로 인간-자연의 관계였어. “정원 일의 즐거움”(이레 출판),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창비 출판)이라는 책에서 몇 구절 옮겨볼게.
어딘가에 내 집을 갖고 한 조각의 땅을 사랑하며, 그 땅을 단지 관찰하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경작하고 곡식을 재배하고 농부들이나 목장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맛보는 것, 지난 2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의 리듬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내게 멋지고 부러움을 살 만한 행복처럼 여겨졌다. (“정원 일의 즐거움” ‘한 조각의 땅에 책임을 느끼며’ 중에서)
나의 어린 너도밤나무가 얼마나 끈질기게 잎사귀를 붙잡고 있는지 그 모습은 늘 기쁨과 감명을 안겨주었다. ... 12월, 1월, 2월 내내 여전히 시든 잎사귀 옷을 입고 서 있다. ... 그러다 봄날 언젠가 ... 나는 이런 변신을 목격했다. ... 며칠 전 강한 북풍이 불 때 나는 여기서 옷깃을 높이 세운 채 추위에 떨며, 휩쓸어가는 바람 속에서도 어린 너도밤나무가 무심히 서서 나뭇잎 한 장 떨어뜨리지 않는 것을 경탄을 품고 바라봤다. ... 그런데 바람도 없이 온화하고 따스한 날씨인 오늘, 불을 쬐며 장작을 쪼개다가 나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거의 숨결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한줄기 바람이 일어났을 뿐인데 그토록 오래 아껴두었던 수많은 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 숨결 같은 바람은 너무나 약해서 그토록 가볍고 얇아진 작은 나뭇잎들을 멀리 밀어 보내지도 못했다. ... 이 놀랍고도 감동적인 광경에서 내게 무언가 계시가 나타났던가? 그것은 자발적으로 쉽게 이루어진 겨울 잎의 죽음이었던가? 그것은 생명이었나? 갑작스럽게 깨어난 의지로 공간을 차지한 봉오리들이 밀쳐내며 환호하는 젊음이었나?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동작과 정지의 일치’ 중에서)
아마도 조국이 저지른 전쟁 탓에 더 그랬겠지만 헤세는 자연과 대화하기를 즐겼고,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발견하려고 했어. 2천년 간 농부들이 이어온 끈을 이어가는 것이 특별한 자격인양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이 순박해보이지 않니? 그리고 나무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추상과 보편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그의 직관력도 대단해 보이네. ‘인간-자연’이라는 인간의 조건은 수천년 간 인간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해. 비록 기휘 위기로 인해 자연의 복수가 심해지고 회복불가능한 지경이 될까 염려되긴 하지만.
두 번째 조건, 작업. 수많은 작품을 써온 작가이기에 내면의 고민에 집중하면서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고독한 ‘작업’을 계속 해왔다는 건 우리가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이번에 네게 소개할 헤세의 면모는 화가의 모습이란다.
나는 아주 훌륭한 화가는 아니다. 나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계절마다, 날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변하는 이 골짜기의 모습, 저 평지의 굴곡과 호숫가의 형태와 풀밭 사이의 구불구불한 길을 나만큼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그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밀짚모자를 쓰고 배낭을 메고 한 손에 작은 접이 의자를 든 화가가 있는 것이다. ... 이 저녁 시간 동안, 내가 마을 위 산자락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이 찬란하고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관객이나 관찰자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으며 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뭔가 갈망하는 어린 아이처럼 의연히 내 행위에 몰두하고 내 놀이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화가 헤세”(이레 출판) ‘수채화’ 중에서)
누구나 마음 속에 무언가는 있고, 누구에게나 말할 무엇이 있다. 그러나 침묵하거나 더듬거리지 않고, 말로든, 색채로든, 음조로든 그것을 정말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아르헨도르프는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었다. 르누아르도 대단히 심오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들에겐 많든 적든 말해야 할 것이 있었고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은 펜이든 붓이든 던져버리는 게 나으리라! 아니면 틀어박혀 연습을 계속하는 것, 뭔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뭔가 이룰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되풀이하는 길도 있으리라. 나는 배낭을 꾸리면서 두 번째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화가 헤세” ‘빨간 물감’ 중에서)
스스로 수채화가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수채화를 팔아 생계에 보탬이 되기도 했을 만큼 많이, 또 잘 그렸던 그. 그에게는 그림이 가벼운 취미가 아니었고 더 높은 경지에 도전하면서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였던 셈이지. 그런 그가 ‘내 놀이를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할 때에 아빠는 마치 ‘팅’하고 머리 속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무언가 이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그래서 결국 ‘표현’하기 위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고 잔소리하는 그이지만 그 연습은 순전히 놀이일 수도 있다는 걸 아니 놀이가 되면 좋다는 걸 일깨워 주었거든.
이제 셋째로 ‘행위’자로서 헤세를 보자. 사람 사이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회적인 일을 하는 삶의 조건이지. 헤세는 이 조건을 반전反戰과 평화를 통해 형성했단다.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역사비평사)에 소개된 헤세의 삶을 보니 그저 자연에 빠져 글이나 쓰던 작가가 아니라 어려운 시국에서도 반전과 평화를 지지하는 양심을 표현한 지성인의 모습이 보이더구나. 1차 대전이 발발한 지 3개월쯤 지난 1914년 11월에 헤세는 스위스 신문에 시론을 발표하여 전쟁은 극복해야만 하며 그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이자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길이라고 용기 있게 말했어.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1년 뒤인 1915년 10월에 다시 같은 신문에 글을 실어 전쟁을 비난했었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많은 이들의 공격을 받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죽음, 막내 아들의 중병, 아내의 정신병 악화가 동시다발로 진행되었어. 한편 1931년 독일에서는 파시스트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면서 2차 대전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는데 그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파시스트를 막기 위해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부탁하자 그는 ‘거부’라는 시를 써서 자신은 파시스트도 공산주의자도 될 수 없다고 했어. 또한 반유태주의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지. 그러자 그는 반전과 평화의 양심을 지킨 인물이 되어서 1933년에 히틀러가 제국의 수상이 되자 토마스 만과 브레히트 같은 망명 작가들이 헤세의 집에 피신하기도 했다고 하네.
당시 많은 문학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이 독일을 찬양했듯이 우리도 일제 시대에 일제를 찬양하던 문인들이 많았지. 그들은 그때도 지금도 잘 살고 있어. 헤세도 그런 편한 길을 택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그저 숨어서 발언하지 않는 것으로 교묘하게 시대의 칼날을 비켜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구나. 이것이 그가 양심에 귀 기울이며 떳떳하게 사회 개혁에 참여했던 행위자로서 보인 면모라고 할 수 있어.
오늘은 농부이자 정원사, 화가, 사회비평가로서 헤세의 삶을 살펴봤어. 음악애호가, 시인, 동화작가로서 그가 지닌 다채로운 모습은 미처 다루지 못했는데 음악과 시에 대한 조예는 네가 더 깊은 듯하니 너에게 그 측면에 대한 탐구를 넘겨도 될까?
지난 편지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겨내기 쉽지 않다고 했는데 헤세는 그 많은 인생의 굴곡을 지나면서 존재가 너무 무거워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았고, 잡초가 사방팔방 뿌리를 뻗어가듯이 ‘노동-작업-행위’라는 모든 영역에 골고루 뿌리 내리며 자기 삶의 조건을 이뤄갔구나.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다음에는 문학비평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자.
- 헤세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