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9
탈식민주의란 식민주의적 관점과 가치관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관점을 부정한다는 뜻이야.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동양을 바라보는 선입견과 편견을 뜻하는데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는 이분법을 내면화하면서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하는 바탕 심리가 되었어.
그렇다면 문학에서는? 식민주의 관점을 답습하거나 제국주의를 옹호하거나 심지어는 그런 줄도 모른 채로 나는 떳떳하고 자주적입네 하며 착각하는 문학 작품들이 있을까? 서양이라면 막연히 동경하고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사회적 성취를 얕잡아보는 그런 관점이 너무 만연해서 문학에도 은근히 투영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는 몸서리치면서도 영국이나 미국이 전 세계를 무대로 식민 지배를 벌인 일에는 무감하고 오히려 두뇌 속까지 미국인, 유럽인이 되어 고상한 세계시민인 척하고 싶지는 않을까?
일곱 번째 편지에서 다룬 곽재구의 시집에 흥미로운 시가 있어. 말했듯이 1980년대 초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의 상처로 인해 미국에 대한 강한 저항이 지식인 사이에 퍼지고 있었는데 곽 시인도 그런 생각이었지. 당시 우리나라가 미제국주의와 신군부 정권의 교묘한 결탁 아래 있다고 여기는 거야. 그런데 어떤 미국 시인의 시를 읽으며 복잡한 심경에 놓이지. 시 일부를 보자.
<수백 마리 개똥벌레>
시를 쓰는 일이
개좆보다 못한 날
미국 친구 B.라이샤워의
수백 마리 개똥벌레를 읽는다
신기하게도 그의 시엔 아직
빛과 인간과 인간의 희망이 남아 있고
새벽이며 대지의 정령 더더욱
몇 마리 개똥벌레의 추억까지 남아 있다
나는 그의 고향이
남캘리포니아의 광대한 목화농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가 시를 쓰고 있는 낙원이
유서 깊은 로버트 프로스트 생가의 이층 서재임을 알지 못한다
맞교대를 하며 야근에 들던 밤
공장으로 들어가는 밤하늘에
다래끼 낀 어린날의 수천 목화송이들은 부풀어 피어나고
식민지시절 검둥이 영가 몇 구절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조용히 작업반에 들어갔다
......
친구 라이샤워의 시
수백 마리 개똥벌레를 보고 있으면
개똥벌레들은 개똥이 되어 내 반만년
가나안의 추억 위에 슬픔의 침을 쏘고
개똥벌은 질펀한 개똥이 되어
내 그리운 반도의 전신을 적시고
개똥은 다시 당당히 좆은 세운 똥개가 되어
우리들의 꿈과 희망의 요처들을 들쑤실 때
우리들의 땅 우리들의 하늘 어디에고
아직은 찬란히 떠오르는 별빛 별빛.
라이샤워라는 이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고 평화를 노래하며 몇 마리 개똥벌레의 추억까지 연상할 정도로 생태 감수성이 충만하구나. 곽 시인도 그걸 모르지 않지. 그 순진무구한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미국의 ‘개똥벌레’는 어느새 ‘개똥벌’이 되어 우리 한반도에 슬픔의 침을 쏘아대고, 또 어느새 ‘개똥’이 되어 우리 땅을 똥무더기로 만들더니 이제는 아예 ‘똥개’가 되어 심지어 좆을 세운 위세 등등한 지배자가 되어 우리를 들쑤셔 버리는구나. 그래서 시인은 라이샤워가 노래하는 광활하고 평화로운 남캘리포니아의 목화농장의 풍광보다 거기서 일하는 흑인 노예의 영가에 더 끌리고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다래끼가 나기 일쑤인 어린 직공들이 마치 풋풋한 목화송이처럼 보여 더 안쓰럽구나.
강한 정치적인 입장에서 문학에서도 의도적으로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런 작품이 아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혹시 지난 편지에서 백석 시인이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압력으로 인해 선동적인 시를 써야만 했던 상황과 비슷한 정도의 경직성을 느낄지도 모르겠네. 물론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지만 말이야.
어쨌든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식민성을 배격하고 자주적인 관점, 다양성의 관점, 우리의 처지를 성찰하는 관점으로 문학을 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인정할 만하구나. 플라톤이 쓴 “국가”(혹은 “공화국”으로 번역된 제목의 책)에 ‘동굴의 비유’가 나오는데 모두가 동굴 속이 마치 온 세상인 듯 착각하며 미몽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탈식민주의 문학이 나타나 그러한 무지를 일깨워 준다면 참 좋은 일이 아니겠니?
오랜 기간 서양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세상에서 문학마저도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제1 세계 문학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괜찮다거나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겠지. 다행히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쓰인 문학 작품들이 많이 있어. 예컨대 세계 문학 전집에 늘 포함되는 “제인 에어”라는 작품을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인 에어”에서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로 나오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 여인이 영국이라는 거대한 제국과 또 남성 우위이라는 이중의 속박에 의해 점차 미친 여자로 낙인 찍히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한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 백인 제국주의 남성의 시각과 유색 인종 식민지 국가의 여성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체감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소설을 비교해가며 읽을 가치가 있단다.
문학계의 깨인 목소리들은 늘 약자의 처지를 복원하고 옹호하며 뭇생명의 평등을 주장해왔어. 그래서 세계인들이 공통되게 고통받는 구조 - 성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민족차별, 계급차별 - 에 대해 생동감 있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로 그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해왔지. 그런 측면에서 탈식민주의 관점의 소설도 세계사에서 제국주의의 확장이 본격화되었던 18세기부터 200여 년이 넘는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억압을 고발하는 목소리라고 볼 수 있어.
그런데 제국주의의 침탈이 100여 년 전만큼 확연하지 않은 오늘날, 그러한 문제 제기가 여전히 유효한 영역이 있을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구조적인 억압, 굳어져 가는 지배 구조가 있을까? 귀뚜라미의 더듬이처럼 민감하게 감지해야 할 우리 안의 또 다른 식민성이 있을까?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짚어볼 문제구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비서양이라는 구도부터 벗어나야겠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하는 고전처럼 떠받드는 태도에서 탈피하는 것, 비서양이 곧 동양인 것처럼 생각하여 다른 많은 세계들, 이를테면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은 관심도 두지 않는 태도는 문제겠지. 영미 문학만 잔뜩 읽고 양념처럼 아프리카 문학 한두 편 읽은 다음 세계 문학을 다 아는 척하지 않는 태도도 중요해. 그리하여 어떤 작품의 진가를 그 자체로 평가하는 공정한 잣대를 마련하여 국적이나 문화권에 연연하지 않고 폭넓게 독서하기. 이런 것들이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는 몇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해.
인류가 긴 세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투쟁과 전쟁을 일삼았고 그래서 문학에도 편을 가르는 경향이 있다는 점, 또한 미국과 독일처럼 부자 나라가 되기 위해서 일단 그 나라 문화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 문학도 그쪽 문학을 먼저 하려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 이런 점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더라도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칭 문학가라면 그러한 한계쯤은 가뿐히 뛰어넘을 용기와 의지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하루하루가 평화롭길.
- 우리 안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