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0
이 책 역시 너의 책상 위에서 발견하고 내심 놀랐던 책인데... 나 대학 1학년 때 발견했던 책이고 상당한 놀라움으로 다가왔던 책이지. 일단 제목이 주는 철학적인 호기심, 책에 묘사된 과감한 성 묘사, 그리고 동구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첫 인상...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한 이십 년을 잊고 있다가 네 책상 위에서 보고는 한순간 시간 여행을 하여 스무 살의 그때로 돌아갔었지.
인생을 온통 뒤바꿔버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아마도 밀란 쿤데라에겐 프라하의 봄이었겠어. 그의 인생을 잠깐 들여다보자. 1929년생, 그리고 작년 7월에 돌아가셨으니까 거의 100년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구나. 대학 시절 문학과 미학을 공부하다가 영화 기획과 희곡 창작에 대한 공부를 이어갔고 1952년, 33세에는 영화 아카데미라는 곳에서 세계 문학을 가르쳤다고 해. 그러다 1968년에는 체코의 예술가이자 정치가인 바츨라프 하벨과 함께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고 70년에는 공산당에서 추방당했구나. 나중에 하벨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밀란에 집중하기로 하자. 75년에 프랑스로 떠나 81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고 2019년에 다시 체코 국적을 회복했으니 조국을 오래 떠났다가 죽기 직전에 다시 돌아왔네.
프라하의 봄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간섭을 받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야. 서울의 봄이 박정희 갑작스런 사망으로 18년 권위주의 통치가 끝나면서 이제는 새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민주화 운동을 부르는 말인데, 프라하의 봄도 역시 정치의 겨울이 끝나고 이제는 봄이 오려나 잠깐 기대했던 짧은 희망의 시절을 일컫는 말이야. 서울의 봄이 5.18로 끝났듯이 프라하의 봄도 소련의 침공으로 끝나버렸구나. 1968년에 일어난 이 일은 소련의 무력으로 잔인하게 제압되었고 이후 소련이 해체되는 1989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는 점령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웠어.
밀란의 39세에 일어난 이 사건은 그에게 인간과 사회,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민감한 더듬이를 선물해줬을 것이며 그 민감한 촉수 덕에 인간과 사회를 해부하는 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태어난 거겠지.
참을 수 없을 만큼 존재가 가볍다는 건 무슨 뜻일까. 누군가가 생각하는 존재의 무게를 다른 누가 쉽사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격하해릴 때 그가 느끼는 모욕과 허탈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멋대로 살고 있는 또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 허무해서 견딜 수 없어지는 그런 지경을 이르는 말일까. 그것도 아니면 세상이 자신을 숨 가쁘게 억누르는 상황에서 나와 이웃의 존재가 그저 부속품이 되어버리는 세상을 비탄하는 말일까. 어떻게 생각하니? 아빠는 이 소설에서 셋 모두가 조금씩 느껴졌단다.
토마시는 능력 있는 의사이지만 일찍 이혼을 하면서 자신에게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부여된 도덕적 의무를 팽개치는 데 성공해. 이후 바람둥이로 살면서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나름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지. 그런데 소설에서 강조하듯이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서 정말 말도 안되는 우연으로 테레자를 만나고 그녀가 시골에서 상경하여 무작정 토마시를 찾아왔을 때 평소의 그라면 당연히 끊어버렸을 관계를 어떤 설명 못할 심경으로 어어가게 되면서 그녀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게 되었어. 삶의 중반에 관계가 끊어지기 매우 쉬운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가 다시 억지로 그 끈을 이어갔지. 그걸 보면서 아빠는 인생이란 건 이렇게 누구도 심지어 자신도 이해 못할 선택에 영향을 받는다는 걸 느꼈고 모든 사건이 착착 맞아 떨어지는 치밀한 구도를 지닌 소설만큼이나 우연과 불가해함이 이야기를 지배하는 이런 소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
토마시는 왜 그런 삶을 살게 된 걸까. 왜 그리 도덕과 윤리에 질색했을까. 그러면서도 테레자에 대한 의리와 정조를 왜 그렇게 지키려 한 걸까. 두 세상이 서로 옳다고 우기다가 어느 한 편이 힘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그편의 말이 법이고 진리가 되는 상황. 이후의 긴 침묵. 그편이 원하는 말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기 어려웠겠지. 이런 상상을 해봤어. 아주 정의로운 사회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어. 이미 정의는 정해졌고 그 정의를 그대로 따라가야 해. 주변엔 온통 올바른 사람뿐인 세상이야. 이런 세상에서 아이는 얼마나 갑갑할까. 자유를 갈망하는 뜨거움은 누구나 있는데 세상의 부조리를 꿰뚫는 통찰까지 있다면 갑갑함이 배가되겠지. 그 속박을 이겨낼 방법은 뭘까. 그나마 허락된 자유를 끝까지 만끽하는 것? 그것이 토마시의 선택이었지 않을까.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여인. 삶과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충실하게, 가급적 의미 있게 살아가려는 테레자를 만나면서 토마시가 느낀 인지 부조화. 어쩌면 충실한 삶의 태도가 주는 가치에 막연히 이끌리지는 않았을까. 가벼워지고자 그토록 노력했지만 너무 가볍다가는 풍선처럼 완전히 날아가버릴 것 같았기에 본능적으로 생의 의미와 온전한 삶을 갈구하는 테레자를 붙잡지 않았을까 생각해.
이 편지의 제목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라고 붙인 까닭은 밀란의 이 책을 읽은 다음에도 우리가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야. 그는 우리에게 존재가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으며 그 가벼움에 대해 밀란과 테레자와 당시 수많은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려줬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점점 가벼워진다면 그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철학자는 “인간의 조건”이란 책에서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세 가지 기본적인 조건에 대해 말했어. 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영역이 인간의 터전이 되는데,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작업은 인간 내면에서, 행위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터전이야. 어떤 이는 농부로 살면서 매일 아침 들판에 나가 작물과 대화하고 자연의 섭리와 신비에 감사하며 살아가. 다른 이는 자기 작업물에 빠져들어 한도 끝도 없는 완벽을 향해 가면서 어제의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이어가지. 또 다른 이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설득하고 그 자신도 그걸 위해 헌신하게 돼. 세 종류의 삶은 ‘인간-자연’, ‘인간-그 자신’, ‘인간-타인’의 관계를 망라하여 철학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제시하고 있어. 요컨대 이 셋 중에 하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면 삶의 의미를 놓치는 일은,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토마시는 의술을 인정받았으니 ‘인간-그 자신’의 관계에서 그나마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타의로 인해 의사 일도 못하게 되면서 인간의 조건이 흔들렸을 것이고, ‘인간-자연’의 관계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으며, ‘인간-타인’의 관계는 그가 강하게 저항하며 그나마 있던 뿌리마저 뽑아버렸지만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 찾아온 여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도치 않게 실뿌리가 살아남아 겨우 그가 삶을 일구는 터전이 마련되었구나.
인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의로운 척, 자신이 중요한 척하는 꼴도 보기 싫지만 인생을 하찮게 여기며 삶을 마구 낭비하는 태도도 주변을 불안하게 하고 결국 파국에 이르기 십상이기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아빠가 살아오면서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 몇 명 있어. 그중 한 분은 너의 대부님이란다. 평화로운 미소, 가식 없고 담백한 말씨, 따뜻한 배려가 베인 태도, 점심은 금식하면서 신앙심을 가꿔나가는 습관. 단단히 삶에 뿌리 내린 생활인.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하하지도, 우쭐하지도 않는 균형감.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면서 주변에 귀 기울이는 여유. 아마 그분은 인간 존재가 가벼운지 무거운지 그렇게 따져 묻지도 않을 것이며, 어쩌면 이 소설도 읽지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무게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구나. 마치 “싯다르타”의 뱃사람 바주데바처럼.
세상이 무거울 때는 온통 무겁게 사는 사람뿐이라서 그들에 물들어 내 삶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한편 그 무게가 지겨워 완전히 반대로 걷기도 하지. 또 요즘처럼 세상이 가벼울 때에는, 물론 기후 위기라는 무게가 우릴 짓누르지만 그걸 잊고 사는 사람도 많기에 이 세상이 가볍다고 가정하자. 또 다른 종류 무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잊고 사는 사람이 많고 ... 어쨌든 요즘 많은 사람들의 출세의 이유나 성공의 목적이 그저 유유자적, 일은 적게 하고 쾌락은 마구 누리는 그런 파렴치한 권세를 얻는 것으로 보이기도 해. 삶의 의미라는 걸 찾기 어려운, 아이들의 꿈이 일 안하고 놀고 먹는 사람이라는 통탄할 만한 설문 결과가 유머가 된 세상에서 우리는 삶의 무게를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하는 걸까.
잘 산다는 거, 옛 어른들 하시는 말씀으로 사람 도리를 다 하며 산다는 거, 평온한 충만함을 누리며 산다는 거, 그거 어떻게 사는 건지... 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참 어렵구나. 실은 아빠도 엄마도 아직도 고민하고 있단다.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기로 하자.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날 때까지 하루하루 평화롭길.
- 삶의 무게에 대한 고민이 지금 순간을 너무 누르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