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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고래 Jul 02. 2024

청년기 백석과 이후의 삶

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8

오늘 편지의 부제는 ‘천재 시인의 불행’이라고 붙일 수 있을 것 같구나. 시인으로서 재능과 열정이 누구보다 뛰어난 이 섬세한 인격이 일제와 북한 체제의 잇따른 폐쇄성으로 인해 결국은 말라버린 그 여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청소년기 오산학교 수학. 19세(1930년) 일본 유학, 23세(1934년) 조선일보 입사. 24세(1935년) 시인으로 등단. 25세(1936년) 첫 시집이자 거의 유일한 시집인 <사슴> 발간. 29~34세(1940~45년) 만주 유랑. 34세(1945년) 해방 후 고향 정주로 귀향, 은사인 조만식의 권유로 러시아어 통역 담당. 36세(1947년) 러시아 문학 번역. 45세(1956년) 동화시를 발표하며 돌파구 마련. 46세(1957년) 아동문학 논쟁에서 패배하여 자아 비판. 47세(1958년) 창작과 번역 중단. 48세(1959년) 양강도 삼수군으로 강제로 보내져 양치기 업무 등 농촌살이 시작. 85세(1996년) 삼수군에서 사망.      


청년기 백석의 빛나던 시절은 그의 이십 대였구나.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교정뿐 아니라 ‘조광’, ‘여성’과 같은 잡지 창간과 편집에 중심 역할을 맡으며 그의 기념비적인 시집을 발표하던 그때. 광화문 거리를 활보하던 모던 뽀이. 화려하고 훤칠한 그의 풍채에 다들 뒤를 돌아봤다던 그 눈부심. 이런 것들이 모두 20대 초중반에 집중되어 있어.      


지만 이후의 삶은 어떠니. 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일본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던 우리는 식민 지배의 오랜 굴종에 거대한 전쟁의 급박함까지 겹쳐 시인을 포함한 모든 지식인과 작가들이 한목소리로 일제를 찬양하는 암울한 시간이 찾아오게 되고. 점점 숨을 쉬기 힘들어하던 백석은 29세, 1940년에 그래도 여기보다는 낫겠다며 만주행을 택하게 된다. 5년간 방랑자처럼 떠돌다 해방 후 평안도 정주에 계시는 노모를 찾아 귀향하지만 45년의 시국도 만만치 않구나. 아직 남북이 갈라지진 않았지만 좌우익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지. 당시 지식인들의 시각에서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남한보다는 오히려 선명한 개혁의 기치를 내세운 북한이 더 매력적이라 느끼는 사람도 많았으니, 더구나 가족과 터전을 두고 굳이 월남을 해야할 이유도 없었던 백석으로서는 북한에 남는 선택이 자연스러웠겠구나.      


마침 청소년기 오산학교 시절 교장이셨던 조만식 선생의 권유로 러시아어 통역을 맡으며 김일성 체제에 한발 들어서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성으로부터 조만식이 감금되고 그 세력이 와해되면서 백석은 잠시 잠행을 하게 되었어. 시를 쓰는 일이 너무 위험한 세상이었기에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로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문학에 몸담는 선택을 하지. 그러다가 ‘동화시’를 번역하게 되면서 이 영역이 정치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 순수의 세계에서 시를 쓰기 시작하고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인 <집게네 네 형제>를 발간하게 된단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지만 웬걸. 동화시마저, 아동문학마저 선명한 사회주의 이념에 복무해야 한다는 극단적 교조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 한국전쟁 이후 유일무이한 권력으로 우뚝 솟고자 했던 김일성이 주창한 천리마운동, 그 운동에 문학계가 나팔수가 되어야 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 아동은 아동답게 순수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을 한 백석은 사회주의 혁명의 방해자, 불순분자가 되어 자아비판을 하게 되고, 결국 현대판 귀양, 삼수갑산으로 쫓겨나게 된다. 한반도에서 제일 높고 추운 곳. 연평균 기온 2도. 개마고원의 삼수갑산. 소월의 시에 나오는 그 삼수갑산. 거기서 생전 처음 양을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결국 85세로 죽을 때까지 거의 37년을 귀양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대관절 백석이 쓴 동화시가 무엇이었고, 당시 북한에서는 어떤 시를 써야 살아남았던 걸까. 백석의 시에 대한 비판(안도현 저, “백석 평전”, 다산책방, pp.344~346)을 보자.      


<메’돼지>      

곤히 잠든 나를

깨우지 말라.

하루 온 종일

산’비탈 감자밭을

다 쑤셔 놓았다.     

소 없는 어느 집에서

보습 없는 어느 집에서

나를 데려다가

밭을 갈지나 않나!     


비판: “남의 감자밭을 쑤셔놓고도 그것을 장한 일이나 한 줄 생각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자를 조소하는 자를 강하게 역점을 찍어주지 못한 데 그 결함”(리원우 작가동맹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산양>     

누구나 

싸울 테면 싸워보자

벼랑으로만 오너라.      

벼랑으로 오면

받아넘길 테니,

까마득한 벼랑 밑으로

차 굴릴 테니     

싸울 테면 오너라

범이라도 곰이라도

다 오너라. 

아슬아슬한 벼랑’가에

언제나 내가 오똑 서 있을 테니.     


비판: “우리 시대의 어떤 생활의 진실을 반영하는 측면에서 결함을 갖고 있다. 자기 노력으로 사는 평화적 산양, 그러나 약탈자들인 범과 곰이 쳐오면 벼랑으로 차 굴리겠다는 정신으로 아동들을 교양하기 위해서는 ‘오똑 서 있을 테니’는 부족하다.”(리원우 작가동맹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그렇다면 이런 교조주의적 비판에서 빗겨난 오히려 칭송받는 작품은 무엇일까. 사회주의 발전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시, 학령 전 아동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문학이라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백석의 “메’돼지”에서 소도 보습도 없는 집에서 멧돼지를 데려가다 밭을 갈면 어떨까 하는 아이다운 환상, 평화로운 상상은 허용되지 않고 오직 사회주의 혁명 건설에 복무하는 문학,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장르에 속할 것을 강요받고 있구나.      


이후 1958년 9월, 이른바 붉은 편지(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편지) 사건, 사회주의 사상개조운동인데 조금이라도 순수성이 의심되면, 즉 김일성 체제에 반발하면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생각마저 통제하려는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극단적 통치형태를 떠올리게 하네. 이 사건으로 그나마 아슬하게 이어가던 창작의 불꽃은 그만 사그라들고 만다.      


아빠가 백석을 좋아하게 된 때는 대학 1학년 여름, 농활을 가던 차 안이었어. 98년 여름, 당시 아빠는 야학 교사를 하고 있었기에 대학 동아리의 여름 농활에 처음부터 참여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이삼일 정도 늦게, 혼자 서울에서 경북으로 버스를 두어 번 갈아타고 내려가게 되었단다. 거의 온종일 걸리는 길을 혼자 가려니 막막해서 도서관에서 책이라도 빌리자는 심정에 우연히 발견한 반가운 제목, “백석 전집”. 신구약 합본만한 두께의 그 시집은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쯤은 넉넉히 채워줄 힘이 느껴졌어. 신촌에서 동서울 터미널로 가는 지하철, 동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 대구에서 또 어느 시골로 가는 버스에서 더위에도 기다림에도 지치지 않게 평안도의 눈발처럼 서늘한 독백과 따습고도 정겨운 풍경을 선사하며 나를 산뜻하게 해줬단다. 긴 여행길이 어서 끝나기보다는 오히려 좀더 걸려도 좋을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나는 그 책이 정말 좋았어.      


그렇게 흠모하던 백석을 그저 천재 시인, 월북 작가지만 한국에 두터운 팬을 보유한 드문 작가, 수능에도 교과서에도 많이 실리는 인정 받는 시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보다 더 백석을 사랑한 듯한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을 읽고 나서 그의 인생이 짧은 전성기와 긴 후퇴기로 이뤄진 것을, 일제와 북한 체제 둘 다의 피해자임을, 섬세하고도 높은 영혼으로 시를 쓰고자 몸부림치던 그가 점점 김일성 찬양시를 쓰다가 결국은 아예 쓰지 못하게 되는 길고 긴 중장년기와 노년기를 보냈음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내 감정은 순수한 찬양에서 애달픈 찬미가 되어버렸어.      


그가 일제의 칼날 아래서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만큼이나 좋아하는 시. “수라”를 읽으며 편지를 마무리하자.          


<수라>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하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끼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여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이상의 <날개> 첫 문장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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