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6
오늘은 한국 소설의 중심이 ‘사회’에서 ‘개인’으로 넘어가는 양상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 “객지”는 황석영의 중편 소설로 1971년,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이 시작된 지 10년째,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는 때 발표된 소설이고, “경마장 가는 길”은 하일지의 장편 소설로 1990년, 그러니까 87년 민주화 운동과 88년 서울 올림픽이 지나고 점차 생활 수준이 높아지던 때에 발표된 소설이야.
“객지”의 배경은 60년대 어느 바다 간척지 공사장이야. 우리나라에 간척지가 많지. 그런데 그 넓은 땅을,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들이치는 곳을 어떻게 메웠을지 생각해봤니? 결국 바위를 깨서 돌을 날라 쌓고, 흙을 붓고 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데 썰물 때에 맞춰 밤에도 꼼짝 없이 일을 해야 했어. 밤바다. 사방이 캄캄한데 바지를 벗고 허리춤까지 차는 물에 들어가 작은 카바이트 불빛으로 바위 쌓을 곳을 알려주면 커다란 돌들이 굴러 떨어져 첨벙 빠지면서 얼굴이며 온몸을 다시 찬 바닷물로 적시는데, 이 일이 그나마 쉬운 일이라 초짜들이 하는 일이었고 그런 채로 몇 시간 있다가 나오면 몸에 감각이 없어질 법도 하지. 굴러오는 돌에 찍혀 한순간에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뼛속까지 차갑다가 점점 마비되어가는 신경을 견디는 일은 그나마 할만한 일이었던 거야.
그런데 이 힘든 노동환경을 더 어렵게 하는 건 다름 아닌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부도덕, 탐욕, 지배욕이었지. 회사는 공사를 따내기 위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입찰에 응했고 이익을 남기자면 노동자를 짜내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 일을 직접하기는 싫으니 중간 관리 업체를 세워 적당한 이문을 남기고, 중간 관리 업체는 현장관리소장, 십장(10명의 대장), 서기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정해진 임금보다 적은 돈을 주고, 그걸 노동자들이 식권(전표)와 교환할 때는 또 조금 이문을 취하고, 숙박비와 식비를 비싸게 받으며 자연히 번 돈을 다 쓰게 만들고, 술까지 팔면서 빚을 지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일을 할수록 빚쟁이가 되기 십상이라 공사가 끝날 때까지 떠날 수도 없게 돼. 이렇게 부조리한 구조에 모두 당하고 있으니까 단결해서 파업이라도 하면 될 텐데 그도 쉽지 않아. 관리업체는 파업을 일부러 유도하면서 주동자를 색출해서 쫓아내기도 하고, 파업에 미온적인 사람들에게 몰래 이권을 약속하며 단결을 흐트러뜨리기도 하고, 감독조라는 미명으로 깡패들을 고용해서 직접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면서, 급할 때는 경찰을 동원해서 공권력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어. 더욱이 노동자들도 제각각이라 얌체처럼 구는 사람도 많고, 자포자기형도 많고,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한 사람도 많아서 아무리 부조리한 현실이 공통되게 작동한다 해도 이것을 함께 바꿔나갈 동력을 만들긴 어려웠던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인공인 동혁은 간척지 공사장에 쌓여가는 불만과 부조리를 모아 단결된 힘으로 파업을 주도했고, 국회의원이 방문하기로 한 시점에 맞춰 쟁의를 벌여 소기의 성과를 얻으려는 기민한 판단력을 발휘하기도 하지. 내일모레 온다는 국회의원 방문일에 이틀 앞서 시작된 파업의 참여자들은 관리업체가 부른 경찰에 밀려 주변 야산에 고립되게 되고, 다음날 관리업체의 달콤한 제안(임금 인상, 관리조 해체, 숙박과 식비 현실화)에-결국은 기만적인 술수였던 그 제안에- 넘어가 그나마 단결하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결국 동혁이를 중심으로 한 소수만 계획대로 국회의원 방문일 공식 협상을 위해 하룻밤 더 지새울 결심을 하게 돼. 그날 밤 동혁이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는 독백을 하며 소설이 끝나.
부랑자, 떠돌이, 날품팔이, 하류 인생, 먼지 같은 존재들, 이름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이뤘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그래서 작가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이들의 삶을 작품 속에 복원함으로써 낮은 목소리, 작은 목소리를 우리가 집단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려 해. 비록 그들이 부도덕하고 인격이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더군다나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욕설과 행패와 천박함을 거대한 부조리에 갇힌 이들의 신음으로 관대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또한 그 와중에도 노동환경을 개선해야만 모두에게 이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정의로운 행동가들이 간혹 있기 마련이므로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긍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때의 가난한 대한민국이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기까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한 고도성장을 이룬 저력의 발판을 바로 그들에게서도 일부 찾을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렇게 작가들은 낮은 목소리를 찾아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공식적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민중사관의 역사를 허구로 이뤄진 가상 세계에서나마 나름대로 견고하게 구축하려고 했었나 봐. 이문구의 “관촌수필”이나 나중에 편지로 따로 다룰 김용택의 “섬진강”,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와 같은 작품들도 바로 그런 작품들이지. 60년 4.19로 크게 한번 요동친 우리나라가 61년 제2공화국의 의회책임제(내각제)라는 민주화 실험에 실패하고 62년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한번 엎어지면서 긴 권위주의 시절을 맞이했는데 그 시절 작가들은 그들의 유일한 무기인 글로, 작품으로 민주화 운동을 한 셈이기도 해.
그런데 우리가 87년 민주화 운동으로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라는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고, 88올림픽이라는 경제와 문화 면의 성공을 경험한 다음에는 이제 더 이상 골치 아픈 사회문제에 골머리를 썩히기보다 나 하나의 성공과 쾌락에 관심을 옮기는 시대가 오게 되었어. 독일 통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이 끝나고 이제는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인식이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시대 조류도 그런 변화를 추동하는 데 한몫했지.
1990년 발표된 “경마장 가는 길”은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불륜 관계로 동거한 R(남)과 J(여)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남자는 관계를 지속하려 애쓰고 여자는 마다하면서 밀고 당기는 이야기야. 이 유치하고 뻔한 이야기가 한국 소설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신선하고 충격적인 시도인데, 그 까닭은 바로 소설의 인물이 사회 계층이나 사회 관계를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대리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어떤 사람인, 다시 말해 사회가 아닌 개인에 온전히 집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지.
사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사회가 어찌 돌아가든 내 길을 간다는 식의 생각이 그리 유난스레 비치지 않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개인의 존재는 미미하고 언제나 사회적 존재로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소설이 거의 없었어. 물론 어느 시대나 현실에 초연한 사람들이 있고 속물들이 있고 괴짜들이 있어서 “경마장 가는 길”에 나오는 R처럼 지배욕에 빠져서 지식인입네 하며 위선을 떠는 인물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것이고 굳이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표현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몰라. 하지만 1990년 이 작품이 발표되고 화제가 되면서, 더욱이 당시 최고의 여배우 강수연이 주연을 맡는 영화로 흥행까지 성공하면서 작가들은 ‘아,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써도 되는구나!’하는 어떤 놀라움과 깨달음을 느꼈을 것 같아.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가 열린 거지.
우리가 일제 시기와 6.25 전쟁을 지나며 세계 최빈국 수준의 극단적인 가난과 헐벗음을 겪었지만 2024년 현재 플라스틱 일인당 배출량 세계 3위 국가가 될 정도로 풍요와 사치를 누리고 있어. 지금부터 백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상당히 긴 시간을 사회라는 무거운 담론에 빠져 살다가 개인으로 넘어온 지는 비교적 오래지 않은 셈이지.
사회 변화와 상관없이 내 행복을 추구하려는 소시민의 소박한 욕심.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에 놀라면서도 슬쩍 호응하고 싶은 부끄러운 뻔뻔함. 세상은 이제 살만하니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성급한 합리화. 이런 것들이 90년대 초 우리가 공유했던 집단 무의식이 아니었을까.
정태춘과 박은옥은 민중가요 가수인데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곡이 있어. 가사를 잠깐 보자.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70~80년대 치열한 시위 현장이었던 종로 거리에 이제 웬디스 햄버거가 들어오고 사람들은 그저 입술 굳게 다물고 흘러가는 시대가 되어 버린 92년의 풍경을 그리고 있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웠던가, 동지들이 죽거나 다쳐도 왜 그리 치열하게 싸웠던가, 고작 외국 자본이 들어오기 편한 세상을 만들려고, 이기적인 소시민을 가득 양산하려고 그렇게 살아왔던가’하는 아득하고 아찔한 시대 인식이 드러나 있어. 사랑도 명예도 없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90년대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고 쓸쓸할 줄은 몰랐겠지. 민중가요에서 그리듯이 대동 단결 세상, 따스한 공동체가 실현될 줄 기대했겠지. 하지만 실상은 색욕과 권력욕에 빠져 한 여자를 휘어잡으려 갖은 애를 쓰는 똑똑하고 재수 없는 R 같은 놈들이 늘어난 세상이란 사실을 “경마장 가는 길”이 생생히 보여줬어.
오늘 편지는 길어졌구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읽었던가? 과거에 어떤 여인이 애틋한 사랑 편지를 쓰면서 오늘은 정성이 부족해 편지가 길어졌다는 말을 썼다는 일화가 생각나네.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 벌써 여섯 번째 편지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는 오늘,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