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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고래 Jul 02. 2024

"싯다르타"와 구도자의 길

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5

 

너 중2 때인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내심 놀랐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놀라웠거든. 아빠 중2 무렵 읽었던 그 책을 네가 선택했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놀라움을 느꼈지. 그나저나 어떻게 그 책을 찾게 된 거니?     


오늘은 문학 다섯 번째 편지로 이 책에 대해 그리고 책의 주제인 구도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헤세의 작품에는 성聖과 속俗에 대한 구분이 명확한 대비를 이루는 작품이 많고, 그 두 세계의 통합과 초월을 암시하는 주제도 많은 것 같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라는 이분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경험하고 주장해 온 인식틀이라서 이런 구도로 작품을 쓰면 국경과 시대를 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헤세의 작품에 그런 매력이 있어. 시대와 장소, 또는 특정 사건을 다룬 작품들은 그 일을 경험하거나 그 일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과 대조되지.     


이 소설에서 주인공 싯다르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가모니, 즉 고타마 싯다르타와 동명이인이구나. 소설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 예수라는 이름이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던데 비슷하게 싯다르타라는 이름도 그랬나 보다. 아무튼 이 주인공은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에서 태어나 고행을 하는 사문의 길을 가면서 성스러움의 세계가 허락하는 수련에 매진하다가 속의 세계, 시장과 생활 세계에 들어가 거의 이십 년을 세상에서 배우지. 그러다 다시 그 세계를 나와서 강가에 정착하여 그가 경험한 성과 속의 세계를 종합하고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 편이니? 성스러움은 마땅히 추구할만한 것이고 속된 것은 응당 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니면 성과 속이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며 성 속에 속이 있고, 속 속에 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도 아니면?      


성스러움에 매료된 사람들은 속된 세계를 멀리하며 죄악시하기도 해. 종교인 중에 그런 태도를 보이면서 가끔 편협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많지. 반대로 성스러움을 지향하면서도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면서 속된 세계를 함부로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않는 신중한 신앙인도 물론 많이 있고. 그런데 성스러움을 한번 경험하면 속된 세계에 가까이 가기 싫고 각종 탐욕과 허위에 물들지 않기를 기도하게 된단다.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는 세 가지로 탐, 진, 치를 언급하는데 그 뜻은 아래에 적을게.     


탐진치貪瞋癡 :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번뇌는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 함.     


탐진치에 빠져 헛된 인생을 사느니 성스러움을 추구하며 참된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소박하고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니? 그런가 하면, 성스러운 체하고 젠 체하며 으스대는 사람들이 오히려 위선적이라면서 차라리 솔직하게 본능을 인정하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아. 속의 세계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헤세는 두 세계의 종합과 초월을 지향하고 있구나. 주인공 싯다르타가 중장년기에 이르러 강물을 보면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그건 2~30대의 경험, 사랑과 쾌락, 사업의 성공, 도박 중독, 자식에 대한 집착들을 두루 경험하지 못했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측면에서 꼭 필요한 단계였던 셈이지. 달리 말하면 성의 세계는 글과 책이 주는 각종 지혜를 탐구하는 길이며 속의 세계는 감각과 느낌, 생동감과 생의 의지가 약동하는 길이므로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우위에 둘 수 없다는 관점인 듯해.     


하지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양시론의 태도는 결국 아무런 의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경계해야 하는데 헤세는 양시론이 아닌 초월의 경지를 말하고 있으며 결국 성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듯해. 요컨대 속의 세계는 더 높은 차원의 성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한 디딤돌이랄까.      


화의 차원을 달리 해보자. 인생을 고행하듯이 사는 사람과 여행하듯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구나. 고행은 성의 세계, 여행은 속의 세계일까. 고행은 하기 싫지만 옳은 길이고 여행은 하고 싶지만 꼭 가야하는 길은 아닌 그런 길일까.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도덕감이나 공인 의식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고행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정치나 사회 운동을 통해서 세상을 개혁하길 원하지. 우리가 이만큼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누리게 된 데에는 그런 선각자, 선구자들의 노고가 꼭 필요했어. 반면 인생을 괴롭게 살 이유가 뭐가 있느냐며 웃으며 즐겁게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람들은 본인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덩달아 나도 행복해지지. 분명 이 삶도 훌륭해 보인다.      


구도자의 길. 인격이 더 높은 차원으로 성숙하고 사회의 정의 수준이 한껏 높아지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이 실현되기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길. 깨끗하고 높고 좁은 길. 그런 길을 아들도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그런 길을 가고자 했고 주변에서도 응원하면서 능히 그 길 위에서 최고가 될 것을 기대했지만, 스무살 무렵 본인 스스로 그 길을 빠져 나왔고, 결국 멀리 우회하는 속의 세계를 거쳐 다시 강물에게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길,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 윤회의 고통에서 영영 해방되는 길을 배우고 드디어 깨달은 자, 즉 붓다(부처)가 되었어.      


인생은 각양각색이니까 아들의 길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 길이 성이든 속이든, 그 둘이 섞인 애매한 길이든 상관없이 부디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그리고 어느 한 길 위에 있다는 이유로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말고 그들도 나름대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는 희망을 품어주기를 바란다.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 오랜만에 다시 싯다르타를 읽으며 행복했던 지난 며칠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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