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4
오늘은 아빠 열일곱 살 때 이야기를 해줄게. 당시 난 고2였는데 어느 날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낸 J가 글쓰기 대회에 나가자고 하는 거야. 고2라서 수능에 매진해야 할 시기였음에도 나는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제안에 응했지. 사실 그 친구는 나와 초등학교 시절부터 편지를 주고 받았고 문청, 즉 문학 청년다운 면모를 지녔기에 그와 함께 나가는 글쓰기 대회가 끌리기도 했단다. 독서 감상문을 써서 우편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는데 우린 무슨 대단치 않은 상을 받았던 것 같다. 무슨 상이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그 준비 과정만큼은 생생히 기억나.
무슨 책으로 대회에 나갈까. 이 고민은 쉽게 풀렸어. J가 추천한 책이 있었거든. 바로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야. 사실 그의 책 중에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유명한 책은 “달과 6펜스”인데 나도 읽어는 봤지만 첫 장면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내게는 “인간의 굴레”가 훨씬 더 와닿았나보다. 다만 첫 장면은 인상적이야. 더운 남국의 어느 오후에 요양을 위해 머무는 중년의 남자를 어떤 여인이 간호하는데 그 남자가 힘없이 늘어뜨린 손을 정성껏 닦아주다가 손가락이 창백하고 길다는 점에 묘하게 끌리는 심리 묘사가 나와. 당시 열일곱이던 나로서는 처음 보는 감정이었고 인간의 감정이 또는 여성의 시선이 이렇게 복잡다단할 수 있다는 점에, 그리고 소설가가 그런 심리를 포착하고 묘사할 수 있다는 점에 두 번 놀랐던 것 같다.
다시 “인간의 굴레”로 넘어오자. 이 소설은 필립이라는 한 남자가 성장해가는 이야기야. 절름발이였던 그는 유소년기, 청년기까지도 콤플렉스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자기 인생을 찾으려고 노력해. 회계사 수습사원 일을 하다가 기질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화가가 되려고도 하고, 그것도 잘되지 않아 의사 공부를 시작해. 독일, 프랑스, 영국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경험하다가 결국 시골의 어느 풍요롭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샐리라는 여성을 만나 행복을 찾는다는 이야기야. 불구, 아주 작고 적더라도 내가 남보다 못한 면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늘 보인다는 점이 사람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 필립은 발을 절었고 이건 예민한 청소년기의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였어. 그래서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는 언제나 결핍의 흔적이 있었지. 그러다가 그도 세상에 나가 이런저런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밀드레드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를 시작한 거였어. 밀드레드는 나중에 만날 샐리와 여러모로 대조되는데 거칠게 나누자면 도시와 시골, 세련과 순수, 거짓과 진실, 외모와 마음, 이런 식으로 밀드레드는 도회지 여자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남자를 유혹하지만 샐리는 순박한 시골 여자로 남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어. 필립에게, 20대 초반의 대도시에서 만난 밀드레드라는 여자는 아마도 새로운 세상이었겠지. 늘 결핍을 의식하던 그가 사랑을 하게 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거야. 그런데 그 관계가 상처를 주는 방식이라면? 다치고 아프면서도 사랑이라 믿으며 지속하는 관계라면? 충실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 필립은 밀드레드가 발산하는 매력에 한껏 빠져들지만 점점 피폐해지는 자신을 느꼈던 것 같아. 그런 그가 어떤 계기로 시골에 가서 샐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그는 어쩌면 처음으로 평온함, 평화로움을 느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을 드디어 채울 수 있었던 듯해. 평화로움이 인격으로 구체화된 인물, 전신에 체화된 인물, 샐리를 만나 그는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고 시골 의사로 행복한 삶을 기약할 수 있게 돼.
J와 나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독서실 근처에서 만났어. 학교가 달랐기 때문에 우리의 고향인 OO동에서 만났던 듯해. 그렇게 글쓰기 대회 전략을 짰어. 일단 책은 결정이 되었으니 각자 읽어보기로 했지. 그래서 야간자율학습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두툼한 그 책을 재밌게 있었어. 사실 공부가 아니니까 뭘 해도 재밌었지. 그런데 우린 한 가지 참신한 생각을 해냈어. 둘 중 누구 아이디어였는지 분명치 않은데 바로 제출 원고를 편지글 형식으로 하자는 거였어. 편지야말로 우리가 수년째 써온 글이라 그만큼 익숙했고 두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독서감상문을 쓴다는 점도 창의적이었지. 그래서 야자 시간에 책을 읽고 편지도 썼어. 그 초고를 들고 다른 주말에 만나서 원고를 교정하고 흐름을 조율하고 그랬지.
그 몇 주간, 대회에 나가자는 제안을 받은 순간부터 책 읽고, 편지 쓰고, 만나서 대회 전략 짜고, 원고 수정하고 했던 그날의 일들이 나에게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었던 가장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아 있어. 그 편지글은 다 어디로 사라졌지만 아직 한 구절이 생각나. 필립이 샐리를 만난 순간을 나와 J와 필립, 이렇게 셋이서 함께 기뻐한다는 구절이었어. 이 부분을 쓰고 있는데 같은 반 친구가 와서 힐끗 보더니 놀리길래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나거든.
생각해보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도 J가 읽어보라고 한 책인데 지금 보면 그 친구는 참 조숙하고 문학에 대한 소양도 깊었던 듯하다. 너에게도 문학을 이야깃거리 삼아 만나고 대화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어느 한 대목에서 같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는 게 참 소중한 거거든. 그 일이 십대에 일어나면 평생 기억에 남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어쩌면 벌써 공부에 부담을 느끼고, 입시에 신경 쓰면서 좋은 책 한권 읽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는 아들에게, 아니면 반대로 이미 문학을 매개로 좋은 친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를 아들에게, 아빠가 딱 네 나이였을 때인 그날의 기억을, 어쩌면 지금처럼 완연한 봄인, 그래서 정확히 28년 전인 96년 봄에 일어난 그 추억을 너에게 전해주는 까닭은 책이라고는 근처에도 안가는 많은 사람과 달리 문학을 가까이하는 아들이 대견하기 때문이며, 문학을 좋아하다보면 이런 낭만도 생기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며, 문학이 너의 인생에 앞으로도 계속 좋은 역할을 해주길 기원하는 까닭이야.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 편지를 쓰는 금요일이 기다려지는 요즘,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