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3
오늘은 두 작가의 대표 소설을 두 편씩 비교해볼 텐데 순전히 재미를 기준으로, 나의 주관적인 재미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두 작가가 비슷한 시기를 다룬 작품으로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이병주의 <지리산>이 있고, 이후 시기 작품으로 조정래의 <한강>과 이병주의 <산하>가 있어. 이렇게 두 판에 걸쳐 대결을 벌여 보자.
<제1 대결 - 태백산맥 대 지리산>
두 작품 모두 해방 이후 금기시되어 온 빨갱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당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 재미로는 백중세라 쉽게 우세를 점치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승부가 나야 재밌으니까 내 마음속을 따져보기로 하자.
일단 두 작품은 구도가 달라. 태백산맥은 좌우익 등장인물을 고르게 포진시켜 양쪽의 이야기를 골고루 듣는 재미가 있는 반면, 지리산은 좌익의 인물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도야. 태백산맥에는 지식인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망라되어 있는데 지리산은 다소 지식인 중심의 관점에 치중되어 있지. 그래서 20대에 태백산맥을 읽었을 때에는 당시의 다양한 목소리를 이렇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이 대단해보였고 그래서 재미로도 최고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40대가 되어 읽은 지리산은 20여 년 전의 재미를 뛰어넘는 것 같구나. 왜냐면 우리에게는 다소 희귀한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 그것도 배울 만큼 배우고 고민할 만큼 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게 되며 심지어 그 허상을 깨달은 이후에도 왜 사회주의를 떠날 수 없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소설 전반에 걸쳐 박태영이라는 주인공의 사상이 청소년기에서 중장년기에 이르기까지 긴 호흡으로 이어져 있어서 마치 굵은 동아줄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확실히 붙들고 있지. 이건 이병주 작가가 소설가로서 지닌 재능이기도 한데 대하소설의 특징상 수많은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이 사람 이야기 조금, 저 사람 조금 식으로 짜맞추게 되거든. 그러면 아무래도 재미가 덜 해. 하지만 확실히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있고 거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엮이게 되면 많은 일화들이 나와도 엉키지 않고 자리를 잘 잡는 것 같아. 더 몰입하기 쉽다는 뜻이지.
<제2 대결 – 한강 대 산하>
한강은 30대 초반에 읽었을까?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고 재미있는 일화로 가득한 작품이지. 두 가지만 소개할게.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 오히려 친일파의 득세에 밀려 가난하게 살다가 알코올중독이 되는 경우도 많았어. 그런 사람 중 한 명에게 대학생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은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았는지 그 전에 효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대학생 여후배에게 다짜고짜 어디 좀 갈 데가 있다고 하면서 집으로 데려가지. 침침한 방에 들어서며 아들은 결혼할 여자를 데려왔다고 해. 아버지는 아픈 기색이 역력하고 기운도 없는지 새색시가 왔다는 말에도 시큰둥. 그런데 선물이라며 들고 온 소주를 보더니 마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 앉아 금세 화색이 도는 얼굴로 서랍장에서 소금을 꺼내오라 서두르며 큰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벌컥 마시고는 소금을 찍어 먹는 장면이 나와. 이것이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겪는 현실 중 하나였어. 또 다른 장면으로는 70년대 말 우리나라 건설 노동자들이 중동에 많이 갔을 때 이야기야. 무더운 사막지대에도 특급 호텔이 있고 1층 로비에는 시원하고 쾌적한 공기를 맛보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그곳에 특이한 한국인이 있었어. 위아래 정장을 모두 녹색으로 맞춰 있고 로비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사람이지. 중동 사람들은 녹색을 행운의 색이라 여긴다는 점을 알게 된 이 사람은 아예 자신을 녹색으로 치장하는 전략을 택했던 거야. 이 일화는 단순하지만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구나.
산하는 이승만 정권 시기에 실존했던 정치인이자 건설업자의 인생에 약간의 허구를 버무려 그려낸 소설이야. 이종문이란 인물은 시골에서 노름꾼으로 살다가 해방이 되자 허세와 야심에 눈멀어 무작정 상경했고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몇 번의 행운을 주도면밀하게 활용해 결국 이승만의 눈에 들게 되지. 그야말로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단숨에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서는 그 수완이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이게 실화라는 점이야. 그 사람의 성공가도가 결코 아름답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해방정국의 혼란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거대한 위세를 쌓아가는 순간들은 감탄을 자아내는구나.
<종합 평결>
두 판을 종합하여 승부를 내려 한다. 조정래의 소설은 백화점을 구경하는 듯한 재미가 있어. 마치 작가가 작품을 쓰기 전에 거의 모든 사회계층과 우리의 활동 무대(중동, 독일, 서울, 전남 등)를 망라하면서 각 계층과 무대를 대표할 인물과 사건을 골고루 준비해 놓은 듯해. 그러면서 이 인물이 이 지역에서 벌인 일이 저 지역의 저 인물에 영향을 주고, 그 인물들이 혈연과 지연으로 묶여 뜻밖의 사건을 벌이도록 정교하게 구도를 짜고 있는 것 같아. 그 많은 인물 중에 어느 하나도 소홀하지 않도록. 왜냐면 누가 하나 쉬운 삶을 산 사람이 없었으니까. 조정래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조각보처럼 잘 어울리게 엮어나가는 능력을 보여줘. 하도 많은 조각을 짜다보니 가끔 헐겁게 붙은 부분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병주는 달라. 그는 주인공의 삶에 초점을 두면서 다른 이야기는 다소 생략하거나 아예 다루지 않아. 물론 여러 이야기가 동시다발로 진행되기는 하지만 조정래에 비하면 그 정도가 약하지. 그렇다면 누구를 주인공으로 하느냐가 중요해. 그 관점이 독특하거나 매력이 없다면 소설 전체가 재미없게 되니까. 그런 점에서 마지막 빨치산으로 남은 사회주의 엘리트를 주인공으로 삼는다거나 갖가지 비열한 수완으로 국회의원에 건설업계 실력자가 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건 작가의 탁월한 안목이 빛나는 면이야.
세상을 빠짐없이 알고 싶었던 20대의 나에게는 조정래가 더 와닿았지만 그 시대의 누군가, 특히 내가 전혀 몰랐던 그 누군가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싶은 40대의 나에게는 이병주가 더 재밌게 느껴지는구나.
오늘은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누가 더 재밌냐는 식의 단순한 질문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았구나. 오늘 말한 네 편의 소설은 삶이 팍팍하고 여유가 없을 때 나에게 달콤함을 선물해준 고마운 책들이고 그래서 너에게도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다음 네 번째 편지에서는 아빠 고1 때 읽었던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에 대해 이야기해줄게.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 일주일에 한 번씩 쓰는 편지에 재미를 붙여가는 요즘,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