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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고래 Jul 02. 2024

박경리와 박완서

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2

두 사람. 의심할 바 없는 천재들. 하지만 결이 다른, 어쩌면 상반된다고까지 느껴지는 그 차이에 대해 써보려 한다.      


박경리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토지>겠지. 이 책을 나는 이십대에 읽었는데 처음에는 24권의 책을 언제 다 읽나 걱정했는데 절반쯤 넘어서니까 책이 끝나는 게 아까워서 천천히 아껴 읽을 정도였어. <시장과 전장>도 읽었는데 나름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역시 <토지>를 위한 연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박완서의 책 중에선 <엄마의 말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은 해방 전에 남편을 여의고 서울에서 아이들과 억척스레 새 삶을 시작한 어머니의 이야기인데, 제목이 형상화하듯이 그 엄마는 강한 생명력으로 서울 한 자락 땅에 보금자리를 일궈냈지. 생활인의 사소하고도 중요한 감정과 생생한 상황들이 책 읽은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      


두 사람이 상반된다고 한 건 두 측면인데 하나는 이야기의 규모와 관점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문체와 감정 묘사의 차원이야. <토지>의 광활한 무대는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진주, 서울,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펼쳐지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점도 어찌나 다양한지 당시의 인간 군상을 거의 포괄하는 듯하다. 반면 박완서의 작품은 언제나 분명한 화자의 생활 세계가 있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있어. 물론 그러면서도 시대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묘사되지.      


두 번째로 문체와 감정의 측면에서 박경리는 워낙 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긴 시간에 걸쳐 풀어가다보니 선이 굵다는 느낌이야. 세밀한 감정 묘사를 하기에는 24권이 너무 짧았던 걸까. 물론 투박한 듯 무심결에 지나가는 이야기에 세밀함을 함축하기도 하지. 평사리 저택에 일하던 일꾼은 취미도 말수도 없지만 한 달에 한 번, 새경을 받으면 그 길로 읍내로 나가 밤새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 날 새벽,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와 묵묵히 일을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 짧은 일화에 그 무뚝뚝한 사내의 감정의 속살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반면 박완서의 작품은 여성 화자, 여성 인물이 자주 나오는데 그렇기에 감정이 더 세밀하고 복잡다단하고 여러 겹으로 포개져 있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식의 간단한 구분이 통하지 않는 우리네 사정을 섬세하게 해부하는 것 같아.      


이 두 접근법의 차이는 마치 MBTI에서 N과 S의 구별이 연상돼. N은 iNsight에서 S는 Sensitive에서 딴 글자인데, 통찰을 중시하느냐 감각을 중시하느냐는 차이로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거야. N들은 통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몇 가지 사례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고 그걸 토대로 예측도 할 수 있어서 때로 놀라운 속도로 해법을 찾기도 해. 하지만 정확도가 떨어지니까 엉뚱하게 틀릴 때도 많지. 나는 N을 대포에 비유하는데, 대포의 발사각이 정확히 조준되기만 한다면 아주 먼 거리의 목표를 놀랍게 명중시키지만 조준이 틀리면 아무 소득도 없이 오히려 아군에 피해를 끼치기도 하지. S는 개미야. 조금씩 정보를 모아 치밀하고 정확하게 계산하지. 마치 일꾼들이 피라미드를 쌓아 올리듯이 틀림없이 계획대로 조금씩 현실화시켜. 하지만 오래 걸리지. 지루하기도 하고. 큰 틀에서 전략을 짜기보다는 아무래도 당장의 전술에 능한 편이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면한 전투에서 이겨야 하니까 전술도 중요한 건 두말할 나위 없지.      


박경리 선생이 N이고 박완서 선생이 S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구나. 다만 박경리의 이야기가 큰 숲을 그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박완서의 소설은 나무의 묘사에 더 치중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건 내 솔직한 감상이야. 숲을 보기를 중시하는 사람도 나무에 중점을 두는 사람도 있는데 두 부류 모두 나름의 진실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겠지. 그 과정이 너무 달라서 서로의 방식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정상에서 만나게 되겠지. 중요한 건 두 사람의 방향이 정상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닌지야. 사실 방향은 아무도 확신할 수가 없는데 스스로 의심이 들 때마다 N은 나름의 방식으로 통찰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방법으로, S는 또 S답게 더 많은 정보로 더 확실한 길을 모색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하려고 할 거야.      


박경리 선생의 작품은 일제 강점기를 지내는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한데 모아 당시의 시대 감정, 시대 정서를 추출해낸다면 박완서 선생의 작품은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한 인간이 그 시대를 살아가며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의 다양한 폭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제목을 잊어버린 어떤 작품에서 남동생이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후에 조카를 아들처럼 키우는 고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빠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대학교 학과도 공대를 보내고 인문사회계열의 공부에는 얼씬도 못하도록, 그래서 행여나 민주주의라는 불온한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정성을 기울였건만, 조카가 방학 기간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찾아간 도로 공사 현장에서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들으며 자연히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세밀하고 복잡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시대의 감정을 정확히 그리고 있구나.      


숲에서 시작해서 나무를 볼 건지, 나무를 그리다가 숲을 이룰 건지, 둘 중 어느 편인가 하면 나는 전자야. 아빠 고등학교 때 해마다 5월 18일 즈음이면 선생님들 몇몇은 침울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우린 다들 이유를 알고 있었지. 20여 년 전 제자들이 희생되었던 기억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절감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태어난 해, 1980년, 그해 5월에 일이 터졌으니 5.18의 격전지였던 전남도청에 근무하던 할아버지와 또 다른 중심이던 전남대학교에 다니던 막내 작은 아빠 때문에 안절부절하던 광주 할머니 뱃속에서 아빠도 그 일을 경험한 셈이구나. 5.18의 트라우마는 학창 시절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부당한 정권, 사회 부조리, 폭력적인 사회문화, 부끄러운 현대사를 느끼면서, 개인의 노력이나 개성, 각자의 사정이 사회의 변화, 정치의 흐름 속에서 보잘것없어지는 상황을 체감한 거야. 그래서 나무보다는 숲이, 개인보다 사회가, 우리나라보다 국제 정세가 중요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던 듯하다.        


박경리 선생은 숲을 그리면서도 나무의 개성을 놓치지 않았고 박완서 선생은 나무를 그리면서도 숲을 연상하게 하는 걸 보니 마치 무협지에서 정파와 사파의 고수가 각자 극강의 경지에 이른 듯한 형세구나. 가족 배경, 친구의 영향, 사회의 풍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기질에 따라 숲과 나무 중에 한쪽에 기울게 되는데, 아들이 만약 숲에서 시작한다면 우선은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을 얻기에 노력하되 살면서 만나게 될 나무를 먼저 보는 사람들에게 배움을 청하는 여유와 용기를 갖길 바란다. 문학 창작에서든 삶의 지혜에서든.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안녕히!     


- 다음 주 편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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