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블랙 백신
접종 안한 유일한 직원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날로부터 일주일 쯤 지난 퇴근길이었다. 맨해튼 직장 인근 전철역에서 퀸즈로 향하는 W노선을 타고 퀸즈플라자에서 전철 7번으로 갈아탔다. 전철 내부는 주로 히스패닉계 승객들이 많았다. 내 바로 옆에 있던 30대쯤 되어보이는 남성이 버젓이 마스크를 벗고 앉아있는게 아닌가. 나는 살짝 자리를 피해 건너편 문쪽으로 옮겼다. 그런데, 조금 떨어진 쪽에서 내쪽으로 “아시안!” 하는 저음이지만 뚜렷하게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히 아시안이라고 했는데.. 목소리가 난 쪽을 보니, 동유럽 출신으로 보이는 중년 백인 남성이었다. 나보고 말한 건가? 사방을 살짝 훑어 봐도 내 주변엔 아시안이 나말고 없었기에, 나를 지칭한 게 분명한데.. 나는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그 백인에게 들리게 “아이엠 코리안”이라고 소리냈다. 그 친구는 별 반응이 없었다. 감염이 문제가 된다면 지금 이 시점에 중국인들이지 왜 한국인이나 다른 아시아계에게 누명을 씌우냐는 말인가! 억울하게 느껴져 내 뱉은 반발이었다. 그 사람과 싸울지 몰라 주변에 나를 도울 승객들이 있는지 살짝 살폈다. 사람들이 있어 큰 두려움은 없었다. 전철에서 사고나 사건이 발생해도 승객들이 냉담했다는, 두달전 뉴욕시 뉴스 데일리 보도 기사가 떠올랐다.
그런데 내 가까이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근무하는 맨해튼 23가 빌딩 7층에서 근무하던 한인 아가씨. 작은 체구에 인사할 때면 방긋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나와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던 그 아가씨가 퇴근길 1층 건물을 나와, 바로 옆 체이스 맨해튼 뱅크 앞을 지나다, 얻어 맞은 사건이 발생했다. 거구의 흑인 남성으로부터 “칭크 칭크, 바이러스 컨트리”라는 말과 함께 다짜고짜 오른쪽 눈 주위를 강타 당했다. 로컬 방송 뉴욕 1 기사에도 나왔다. 회사 빌딩 체이스 맨해튼 뱅크 주변의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장면도 보였다. 나는 팬데믹 기간이라 사건이 많이 일어날 것 같아, 하루 한번 꼴로 스마트폰으로 24시간 뉴스 방송국인 ‘뉴욕 1’에 들어가곤 했다. 그 피해자가 우리 회사 빌딩 그 아가씨라는 사실을 주변 직원들을 통해 며칠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폭행 장면을 지켜보던 1층 은행 바로 입구의 경비원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우리 빌딩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혹시 경비원은 나하고도 간혹 인사하던 그 퉁퉁한 존 아닌가. 낮에 근무하는 존! 그렇다면 인정머리 없는 놈이지.. 아무리 가해자가 몸집이 좋아 자신이 불리해 보여도 소리 질러 주변 사람들이 몰려오도록 했으면 될텐데.. 전철역에서 폭행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내일이 아닌 양 가만히 있었다는 신문 기사가 또다시 오버랩됐다. 아, 너무 개인주의적인 미국인이나 무관심한 타민족이 싫었다. 아, 그러나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한국인이나 일본인도 요새는 사고나 사건에 끼어들기 싫어 하지 않은가? 흠.. 이제는 다른 은행을 이용할까? 은행 경비가 원망스러워워 그 은행도 싫었다. 불편하더라도 우리 빌딩 두 블럭 떨어진 시티뱅크로 거래 은행을 옮겨야 겠다.
사건 전에 회사 가까운 길에서 마주치면 상냥하게 인사하던 그 아가씨 모습이 계속 어른 거렸다. 내 가족이나 지인이 얻어맞았으면 얼마나 더 황당할까? 그렇지, 남의 일이 아니지? 한국의 모 명문대학에서 중국어학과를 졸업하고 얼마전 도미, 미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다녀야 겠다며 뉴욕시정부 차량 티켓 요원으로 근무하는 50대 초반의 조씨가 며칠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를 구매하지 않았던가?. 길거리에서 교통 티켓을 뗄라치면 제복 차림인데도 자신의 왜소한 체구를 우습게 알고 소리를 지르거나, 몸으로 가로막는 단다. 손을 자기 눈 주변에 갖다대고 ‘칭크 칭크’ 라면서… 요사이 팬데믹 때는 ‘너도 중국놈, 아시안 놈이지” 하는 시선 폭행이 더 심해졌다고 불안스레 말했다.
그가 드디어 페퍼 스프레이를 샀단다. 나도 얼른 아마존에서 그 제품을 찾아보았다. 모양이 데스크탑 컴퓨터용 USB 보다 좀 크고 둥글어 보이는군.. 열쇠에 끼워 넣고 다녀도 되는군. 가격이, 흠.. 20불 정도면 괜찮네.. 어, 위급할 때 높은 피치의 소음을 내는 보신용 알람도 있군. 여성용인 것 같은데.. 모양도 큰 목걸이 처럼 예뻐 보여 알람으로 보이지 않겠군. 나는 우선 한 세트 4개짜리 페퍼 스프레이 패키지의 75불 구매 버튼을 눌렀다. 아내와 아들에게 한개씩 주어야겠다. 우리 빌딩에 폭행 당한 그 아가씨에게도 작은 선물이라며 자연스럽게 건네주어야지. 근데 내 아들.. 아들은 받지 않으려고 할텐데..‘아들아, 폭력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르잖아.. 사이즈가 작으니 그냥 갖고 다녀~’. 그렇게 설명하면서 건네주면 받아 줄까..
오늘은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되어가는데도 마음이 답답하다. 빌딩안도 그렇고 사무실도 그렇고. 팬데믹 바이러스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좀 걷자. 이왕이면 오랫만에 맨해튼 센트럴 파크 근처를 갔다가 허드슨 강변으로 걸어보자. 다운타운 전철역안은 초저녁인데도 한산했다. 홈리스들이 주로 보였다. 카트에 잔뜩 지저분한 옷가지와 큰 비닐 봉지를 넣고 구석에 앉아 있는 흑인 나이든 할머니.. 그리고 카트를 질질 끌고 가는 흑인계 남미 중년 남성의모습도 보였다. 정처 없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블루밍데일 백화점 건너편 렉싱턴 애비뉴 59가 전철역에서 내렸다. 내가 자주 가던 인근 파크 애브뉴를 지나 매디슨 애브뉴, 서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붐빌 시간이고 붐빌 거리인데 사람들은 듬성듬성 보였다. 센트럴 파크 동남쪽 거리에서 쭉 늘어져 여행객을 기다리던 마차와 말들도 거의 보이질 않았다. 팬데믹 전에는 말과 마차가 25대 정도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이제는 달랑 서너대의 마차와 말만 보였다. 마부들은 우두커니 앞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59스트릿 선상을 쭉 따라 걸어 센터럴 파트 입구를 조금 지나쳤다.
서쪽 허드슨 강을 향하면서 오른쪽을 보니 센트럴 파크 작은 연못이 보였다. 59스트릿 콜럼버스 서클을 지나서 암스테르담 애비뉴로 들어서자 마자, 앞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크게 들린다. 빨간색 굵은 선이 십자로로 그려진 하얀색 바탕의 앰뷸런스가 급히 질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앰뷸런스 소리가 또 들렸다. 첫 앰뷸런스 차량 바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지역 주민중에 노약자가 많은 이곳에 혹시 팬데믹 환자들이.. 그렇지 지금은 팬데믹으로 위험한 상황이잖아.. 순간, 아이폰의 인터넷을 눌러 뉴욕시 뉴스 TV 채널로 들어갔다. ny1.com 스마트 폰 첫 화면에 뉴스가 보였다. 브롱스 소재 시립병원 링컨 메디컬 센터에 팬데믹 환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이면서, 그 바로 아랫줄에는 냉동트럭들이 그 병원으로 들어간다는 기사였다. 병원에서 사망자가 급증하는데 냉동 트럭이 병원이 들어간다면.. 불길하다.
나는 허드슨 강가 65스트릿에 도착했다. 강변을 따라 위쪽으로 걷는데 줄지어 있는 고급 거주촌 트럼프 타워들이 오른쪽 뒤로 보였다. 바로 앞에 흘러가는 허드슨강 멀리 뉴저지의 높고 낮은 아파트들이 보였다. 강변옆에 유일한 노천 카페도 문을 닫았다. 강뚝에서 강물쪽으로 툭 튀어 나오게 시멘트로 만들어진 넓은 광장을 강쪽으로 조금 걷다 오른쪽 벤치에 앉았다. ‘여기는 내가 작년 여름까지만해도 주말에 바이크를 타고 맨해튼 125스트릿에서 허드슨 강변 좁은 길을 따라서 맨해튼 다운타운 명문 스타이븐슨 공립교 강변까지 신나게 달리며 쉬던 곳이 아닌가?’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 뉴저지와 맨해튼을 연결하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가 희미하게 보였다. 여름이고 아직 초저녁인데도 뿌옇게 보이는 건 왜일까? 강바람도 미동도 않고, 날씨도 후덥지근했다. 머리속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물끄러미 강 수면을 바라보았다.
아, 팬데믹! 활기차던 뉴욕시가!.. 왜 이렇게 사는 것이 불안하지?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 공부 위해 미국에 온지도 10년. 가만있자.. 아들이 한국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가족이 미국행에 몸을 실었지. 이제 나이 54세. 내년이면 55세. 은퇴 연령도 멀지 않지만 재정적인 사정도 확실치 않은데… 한국으로 돌아갈까? 아, 그러나 이젠 한국에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은퇴 연금을 여유롭게 받을 나이도 아니고…10년은 족히 더 기다려야 한다. 더군다나 올해 미국서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당연히 미국에 있을 거고, 아내도 아들과 함께 있으려 하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허드슨 강뚝 인도길을 따라 남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맨해튼 지역에서 사무실 빌딩 신축이 가장 활발하다는 34가 7번 종점역 허드슨 야드도 초여름인데도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스마폰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9시. 내 손은 어느새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페퍼 스프레이을 꼭쥐고 있었다. .
팬데믹 관련 크고 작은 폭행 사건이 일어나더니 급기야 큰 사건이 터졌다. 조지아 아틀란타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인 때문이라며 집단 총격을 가해 5명중 한인 여성 4명이 숨을 거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화살이 내쪽으로 향하고 있는 두려움이 갑자기 내 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런데 급기야 두려움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