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증상에 민감한가? 병원 치료 방식은? 병원 생활은? 지인이 뇌경색
한인 지인이 뇌경색 질환에 걸렸다. 자주 병문하면서 그의 상황을 취재 형식으로 정보를 전해듣고 글을 썼다.
맨해튼 대형 병원으로 New York Presbyterian 병원, 코넬 병원,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 등이 있고, 주변 지역별로 이들 병원의 분원 병원도 있다.
전편에 이어 ......................
병세가 악화되는 느낌은, 혀의 움직임은 거의 돌아왔지만 오른쪽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더 불편해 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타이핑을 쳐야 할 오른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현재 보다 봉급 수준이 낮은 일을 해야하는지? 주변 간호사와 의사에게 완전히 회복될 수 있는지 물어봤으나 돌아온 말은 장담 할 수 없다는 것. 그래도 좋은 말을 해 줄 것이지! … 확신은 못했지만 회복에 대한 기대는 있었다.
커튼 옆 내 왼쪽 침대의 환자가 언제쯤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다. 이슬람 계통의 동남아시아 가족들과 지인들이 병실을 찾으며 흐느꼈다. 알라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작지만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절망에 가까운 소리! 한번에 2명 방문자는 불가하다는 규정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인, 친척, 친구들이 속속 찾아왔다. 가족애와 친척애가 남달랐다. 이슬람 문화권이나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그처럼 가족애가 강할꺼야.
옆에 있는 환자에 대해 우연히 알게되었다. 아내가 병문안 오면서 엘리베이터와 6층 바깥 복도에 모여있던 환자 친지들의 대화를 듣게된 것. 환자는 맨해튼 소재 대학의 1학년 여학생으로 평소 천식이 있었는데 알러지 반응 때문에 호흡을 제대로 못하면서…갑자기 뇌사 상태에 빠졌단다. 안타까왔다. 구만리 같은 젊은이에게 일어난 사고라 가족과 지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그렇게 절망적이고, 알라에게 간구하는 기도 소리가 그리도 애절했구나!
이틀째날 물리치료사가 바퀴 4개 달린 Walker를 가져와서는 걸어 보란다. 몸을 제대로 못 일으키는 상태에서 80kg 가까운 거구의 간호사 R이 거의 들다시피 나를 워커에 세웠다. 생각보다 움직이질 못했다. 아내는 나중에 “퇴원 후에도 자연스레 걷긴 힘들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단다. 보행 연습을 시키던 물리 치료사는 팔과 다리 운동 그림이 그려진 한장 짜리 프린트물을 보여주더니, 자주 연습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상태가 갑자기 좋아졌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지팡이를 짚고 걸을만 했다. 혈전 치료 효과가 나타난 걸까? 아, 지인들의 기도 덕분에 주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 같았다. 우려되던 오른손도 거의 회복되는 것 같았다. 감사했다. 중환자실에서 이틀밤을 자고 난 후 일반 병실로 옮겼다.
이곳 간호사들은 하루 12시간 반을 일한다. 일반 병실로 옮기던 시각, 작별 인사를 하고픈대 R 간호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고마웠고, 듬직한 몸에 충실히 환자를 돕던 50대 후반의 간호 보조사 M도 고마왔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또 한사람, 말없이 맡겨진 일에 성실했고, 나를 도와준 필리핀계 50대 중후반 남자 보조 간호사도 기억났다. 아, 이름을 잊어버렸네.
3층 일반 병동도 신경 혈관쪽 환자들만 모인 곳이었다. 내가 들어간 자리는 4인용 입원실 입구 왼쪽 침대였다. 병실 입구 모니터에 앉은 간호사들이 보였고, 진한 분홍색 복장의 간호 보조사들도 바삐 움직였다. 이제는 심신의 여유가 생겼는지 주변도 살피게 된 것이다.
아, 그런데 나를 맡게된 간호사는 매일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한다는 근육질 남자 간호사였다. 신기했다. 실내 입구 벽면의 응급버튼과 내 침대 라이트를 켜는 버턴도 확인했다. ‘중환자실보다는 나에 대한 보살핌이 훨씬 느슨해 지겠군.’ 그도 그럴 것이 한 간호사가 맡은 환자수가 2명에서 8명으로 늘어난 것. 간호사는 병실에 들어와 어김없이 채혈 검사와 더불어 혈전을 풀어주는 약을 먹였다. 환자 도우미 역할을 하는 간호 보조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서로간에 사이도 좋아 보였다. 역시, 좋은 병원이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틈틈히 발을 쭉 펴서 올리고 있기, 오른손 펴기와 접기 운동을 했다. 점차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크게 호전됐다.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지팡이 없이도 혼자 걸었다. 물론 오른쪽 발은 절었다. 자연스레 걸으려고 애를 썼다. 매일 물리 치료사가 오고, 그리고 물리 치료사와 비슷하게 내 몸이 움직이도록 도와주는 직업 치료사도 왔다. 처음엔 지팡이를 잡고 걷고, 2층 층계도 조심스레 오르내리는 연습도 함께 했다.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내 왼쪽 침대에는 콩팥이 감염된 40대 방글라데시 남성 환자가 있었다. 음식 욕심이 많아 간호사와 가벼운 실랑이를 자주 벌였다. 그런데 간호사가 당료 수치를 검사할 때면 어김없이 정상으로 나왔다. 나의 대각선에 있는 환자는 70세쯤되는 조용한 흑인 할아버지로 통풍 환자였다. 매일 병문안 오는 젊은 딸은 “아빠가 관절이 않 좋다”고 전했다. 딸은 활기차 보였고, 아빠를 위해 곧잘 음악을 틀곤했다. 내 침대 건너편의 환자도 흑인 할아버지인데 일체 움직이지 않았다. 마른 체격에 거동은 말짱하셔서 혼자 화장실을 가곤 하지만, 일체 말이 없었다.
나는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자주 복도를 걸었다. 유난스레 자주 걷는 환자는 60여명중에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곳 병동에서 간호사와 간호 보조사인 T, R, S와 친해졌다. 나는 처음 보는 타민족 사람과 급속도로 가까와지는 ‘특기’가 있지 않던가. 통풍 질환 아빠 앞에서 딸이 노래를 틀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내가 인사를 하자 그녀는 내게 자기 아빠의 회복을 위해 함께 춤을 추자고 한다. 함께 춤을 추었다. 곡명은 ‘Love Train’. “각 나라 사람들이여, 사랑의 기차에 함께 탑승하자”는 가사였다. We are the world와 비슷한 가사에 곡조가 흥겨웠다. 우린 함께 춤을 추었다. 할아버지 얼굴은 미소띤 어린아이와 같았다.
드디어 퇴원 하는 날. 병원에 있었던 기간은 정확하게 엿새였다. 소셜 워커는 “퇴원 후에도 당분간 물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나를 휠체어어 태우도록 배려하고 배웅했다. 바깥을 나온 시각은 오후 3시쯤, 태양이 비치고 있었다.
평소에 뉴욕시 병원중에 내가 무척 좋아했던 이 병원. 그리고 의료진의 성실한, 프로패셔널 한 정성과 진료가 훌륭한 점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물론 병원이 시립이냐, 사립이냐, 예산 수준, 의료 운영 방법, 병원 내부의 문화 요소 등에 따라 치료의 질과 환자의 만족도를 다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원의 좋은 치료 수준을 보이는 것 같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리라!
빠른 회복, 의료진의 헌신 , 합심 기도의 힘을 실감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살핌에 깊히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