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묻는다'라는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끼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아무리 좋더라도 싫더라도 시간을 혹은 기억을 묻어 버린다는 건 조금은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좋은 건 좋은 대로, 싫은 건 싫은 대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내가 글이라는 구차한 녀석과 친하게 지내는 이유도 비슷하다. 글이야 말로 시간을, 기억을 그나마 섬세하게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철없이 살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묻지 않고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이란 게 존재했다. 지금의 신경과 사고로는 도무지 견뎌낼 수 없어서 마약성 진통제라도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묻는다'는 행위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듯했다. 피치 못한 순간에, 피치 못한 이유로 말이다.
마약성 진통제를 일부러 쓰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누구나 본능적으로 후폭풍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치 못하다는 건 그런 의미다.
세월이 인생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준다지만, 세월은 흘러가며 반드시 시간과 기억을 남긴다. 그리고 그 시간과 기억의 틈새에는 속속들이 정제된 고통이 들어앉아 있다.
그런 세월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도 묻는다는 걸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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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웃으라고 말했다. 나도 웃기 위해 노력했다.
묻어버린 세월만큼 나는 과거로 되돌아가 있었지만, 몸에는 그간의 시간과 기억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있었다. 나는 흔적들을 잘 가다듬어 즐겁고 유쾌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겉보기에 즐겁고 유쾌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무니까.
효과는 있었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마음과 감정의 에너지가 떨어지는 날에는 후폭풍이 몰려왔다. 의식보다 무의식의 목소리가 큰 날에는 하염없이 추락했다.
그 추락은 이미 예견된 것이어서 딱히 막을 방도는 없었다. 음악과 산책과 독서로 어떻게든 넘겼다. 새로움과 낯섦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됐다. 금세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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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었던 시간과 기억을 열어 지혜만을 살짝 빌렸다. 타임머신을 땅에 묻은 아이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다음날 땅바닥을 파보듯이.
나름은 깊이 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심지가 강하지 못해 그리 깊게 묻진 못했나 보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머리가 드러나는 기분이다.
나는 사실 기다리는 걸 굉장히 잘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사두고는 제날짜에 맞춰 주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선물 한 번, 달력 한 번 바라보다 기념일이 며칠 남은 어느 저녁에 문득 건네고 마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막상 기념일에는 빈손이 되어 멋쩍어한다. 그게 나란 사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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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라 했다. 지혜의 힘을 빌려 한동안 연락 않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본받을 만한 멋진 40대를 살아가고 있는 남자, 이국땅에서 딸아이를 키우며 공부하고 있는 친구, 나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바보 동창들.
이들은 나의 안부를 물으며 친절하고도 자연스럽게 지나간 시간과 기억을 들춘다. 이들에게는 즐겁고 유쾌한 사람이 아닌 나는 조금 당황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잘 웃어넘겨 본다.
이들이 궁금해하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시간과 기억이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 일이 정말 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다 곧 좋음과 행복이라는 감정이 떠오르고, 그리움과 아픔으로 이어지려는 찰나에 나는 진통제를 다시 투여한다.
이번엔 무엇을 배운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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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한동안 묵을 수 있는 비자가 나왔다. 다음 주까지 결정을 해서 회신해 주어야 한다. 작년부터 계획했던 것이지만, 막상 결정의 기로에 서니 나는 또 고민한다. 도전과 도피는 정말 한 끗 차이다.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살아감을 고민한다는 것이 좋은 삶을 위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럼에도, 언젠간 분명 내가 꿈꾸던 모습이 되어 있을 거라 감히 자신한다.
어떻게든 우리는 지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성장하고 있는 걸 테니까.
마음을 굳게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