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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Nov 29. 2022

거북이처럼 가도 괜찮아

아이 교육 이야기만 나오면 외로운 엄마

육아로 만나 꽤나 깊어진 관계가 몇 있다. 아이를 보내는 아침마다, 때로는 주말에도 그들을 만나 (비록 기승전'육아'일지라도)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지만 아이가 커 갈수록 외로움의 파도가 넘실거리다 못해 출렁이고 마는 날들이 잦아진다. 어떤 날은 SNS에 내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이게 만든 글을 올린,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을 찾아가서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외로움이 좀 가실까, 브런치에서는 좀 덜 외로울 수 있을까, 내 글을 읽고 누군가를 끄덕일까, 제발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 오랜만에 '글쓰기' 메뉴를 눌러본다.




육아 동지와 마주 앉은 어느 날,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휴대폰을 열어 아들이 학원에서 배우고 있다는 영어 지문을 보여준다. 아직 내 아이들에게 영어 사교육을 시켜보지 않은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 배운다는 영어 지문을 보자마자 말문이 막혔다. 그한숨을 내쉰 이유는 '아들이 영어 문장은 다 읽는데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엉망으로 대답해서'였고 나의 말문이 막혔던 이유는 '영어 지문이 예상 보다 수준이 높아서'였다. 우리 동네 대형어학원에 다니는 내 딸내미 또래의 아이들은 이런 수준의 영어를 배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레벨테스트 결과에 맞춰 들어간 반인데 이대로 끌고 가야 하는지 고민이라는 그에게 '학원 선생님이랑 상의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라고 밖에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진심은 '벌써 이런 걸 배워? 조금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였다.


둘째와 같은 유치원에 보내는 육아 동지들이 모인 단톡방이 있다. 그중 한 명이 주변에 7세부터 보낼 수 있는 과학 학원이 있으니 팀을 만들어 내년부터 함께 보내자고 하자 단톡방이 뜨거워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나 콕 집어 의견을 묻길래 '유치원 방과 후 시간에 과학 수업이 있으니 저는 안 보낼래요'라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나의 진심은 '과학이요? 물론 학원 선생님이 아이한테 더 집중은 하겠지만 유치원에서도 하고 있는데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요?'였다.

  

이렇게 쓰고 보니 미운 오리 새끼에 나오는 미운 오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도 엄마인지라 육아 동지들의 심정을 충분히 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뒤처지지 않았으면, 내 아이가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그 경험을 바탕으로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힘닿는 데 까지 뒷바라지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말이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학교는 사회생활을 배우러 가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들 보내니까 우리 애도 해야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원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아이 고유의 성장 발달, 지식수준, 하고자 하는 의지, 관심사 등은 고려되지 않은 채 엄마의 욕심 하나만으로 학원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교육이 만족스럽지 못해 사회생활을 배우는 곳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부모의 불안을 먹고 거대하게 자란 사교육도 올바른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과학 학원에 보내자고 했던 육아 동지와 둘이서만 커피를 마시던 날이었다. 그날도 과학 학원이 대화 소재로 등장했고 나는 거절 의사를 확실히 비쳤다. 날 바라보던 육아 동지가 말한다.

"나는 그렇게 중심 잡고 있는 네가 너무 부러워. 친언니가 지금은 안 시켜도 된다고, 놀 수 있을 때 많이 놀아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불안해서 자꾸 시키게 돼."


나도 사람인데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랴. 더구나 내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흔들리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중심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건 토끼처럼 빨리 가다가는 금세 지칠 수 있음을 알고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도 결국 닿을 곳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아홉 살인 딸은 EBS 무료 동영상으로 이제 막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했고 여섯 살인 아들은 최근 들어 한글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슬슬 가르쳐 보려고 한다. 아직 알파벳을 몰라도 다른 친구들처럼 책을 읽지 못해도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저 내 아이들과 속도를 맞추어 하늘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이름 모를 꽃 앞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그런 여정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부럽다는 육아 동지의 말이 휘청거리던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고 요즘 읽고 있는 책의 아래 구절은 큰 위로가 되었다.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것이 없어서, 아이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등을 구실로 아이에게 더 유리한 쪽은 자신이 더 잘 안다고 내세운다. 자기가 원하는 색이 되리라는 기대감에 그것이 굉장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내가 원는 하는 것과 해야 한다고 주입받은 것을 행하는 마음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무리 좋은 핑계를 붙여도 아이의 의지가 아닌 부모의 의지로 미리 색깔을 정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폭력이다.


- 김현주 <아이의 꽃말은 기다림입니다> 1장 꽃을 기다리는 마음 中 일부


제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신 분, 계시면 손 들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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