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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Jan 24. 2024

또 남편이 울었다

가장의 무게

남편이 울었다


회식하고 들어온 남편을 거실에 있던 딸이 달려가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함께 호들갑을 떨며 반긴다. 평소의 남편이라면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가는데 그날은 겨우 신발만 벗고는 현관 앞에서 미동이 없다. 그대로 서 있던 남편은 잠자리 독서를 위해 둘째와 함께 누워있는 내 휴대폰으로 링크를 하나 보낸다.


"내가 이거 보고 울컥했는데 자기도 한번 봐봐."


링크를 열어 보니 어느 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이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저러나 싶어 둘째에게도 화면을 보여주며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정말 간절했던 취직을 했죠. 대기업이요. 자존감은 높게 올랐지만 금세 김 빠진 콜라마냥 꺼졌습니다.(중략) 그날은 문득 더 피곤한 날이었습니다.(중략) 집 가는 길에 파리바게트가 보이길래 들어갔습니다. 저는 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빵집에서 엄마와 여동생이 좋아하는 빵을 골랐습니다. (중략) 사실 좋아하지 않는 빵을 산 건 가족들이 좋아하기 때문이고, 제가 힘들게 돈을 버는 이유를 저도 모르게 찾고 싶었나 봅니다.

그때 문득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어릴 적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 오신 이유, 군것질은 질색이라던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올려두고 방으로 가신 이유. 아마 그날은 아버지가 평소보다 약긴 힘든 날인 것을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 의아했다. 남편이 울컥할 정도면 나도 읽으며 울컥했어야 마땅한데 정돈되지 않은 글에 집중할 수 없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다.

"어떤 부분에서 울컥했어? 자기가 여기 나오는 아버지 같았어?"

"집에 오면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사 오고 싶었거든."

"그런데 왜 안 사 왔어? 우리 아빠도 종종 치킨 사들고 오셨어."


2초쯤이었나.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남편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게 튀어나왔다. 술을 마셔 벌게진 얼굴이라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던 찰나가 지나자, 남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기, 왜 울어. 아이스크림 사 오지 그랬어."

"장인어른도 그러셨다고 하니까 엉엉."

이내 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아빠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본 아이들은 덩달아 울먹이연신 '아빠 괜찮아?'라고 물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편하게 회사를 다닌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남편의 회사는 늘 위태롭다. 좀 더 나은 곳으로 이직을 했다고 믿었지만 이직한 회사도 사정이 다르지는 다. 위태로움이 잦아들고 안정이 되려나 싶다가도 인원 감축이란 피바람이 불기를 반복한다. 그런 곳에서 피바람을 피해 가며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남편에게 한없이 고맙다. 힘드냐고 물어도 한결같이 괜찮다고 말하는 남편이지만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나 보다. 두피에, 얼굴에 자꾸 솟아오르는 여드름을 보면 상당한 스트레스가 있음은 분명하다. 힘든 나날이 이어지다 유독 힘든 날이었구나. 술기운을 휘감고 있었던 건 차치하고 양손 가득 처자식을 위한 아이스크림을 들고 귀가하고 싶었던 그 마음. 내가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닌 처자식이 먹는 모습을 보며 위로받고 싶은 마음. 대한민국 가장들의 공통된 마음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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