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나 Nov 02. 2020

내 삶이 결정되는 순간

다시는 이 순간을 겪지 않기를.

실밥을 뽑기 위해 동네 병원을 방문한 날, 내게 암 확진을 내려준 의사선생님은 아산병원에서 준 소견서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며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난소를 옮겼다고요? 난소를 위로...?... 그럼 방사선을 하겠다는 건가?"


선생님의 심각한 표정에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혹시 방사선을 할지도 몰라서 옮겨놓은 거래요.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아~ 네. 그래요~ 그렇군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시댁에서 아이를 데려온 후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내 몸은 강제로 회복이 되어갔고 주말엔 가족과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도 갈 수 있었다.


드디어 한 달이 되어 아산병원 진료 날이 되었다. 진료는 오후였는데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 워낙 곤욕이라 일찍 나왔더니 진료 시간보다 3시간 전에 병원에 도착했다.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병원 도착했어."

병원 근처에 회사가 있는 남편은 내 전화를 받자마자 출발했고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어 만날 수 있었다.


산부인과에 들러 접수를 하는데 간호사가 조직 검사지를 미리 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곧바로 검사지를 신청했다. 대기의자에 앉아 검사지를 기다리며 남편과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은 핸드폰을 봤고 나는 누군가들을 계속 쳐다봤다.


산부인과 입구에서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왼쪽은 질병으로 인한 외과적 수술을 요하는 부인과 진료실이 배치되어 있었고 오른쪽은 일반 임산부들이 다니는 산과 진료실이 있었다.

나는 산부인과 입구에 앉아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임산부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남편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좋겠다. 암이 아니고 애를 품고 있네. 나도 애기 품고 여기 앉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러자 남편은 꾸짖는 것 같은 말투로 내게 말했다.

"자기야. 저 사람들 그냥 임산부 아니고 고위험군일 거야. 오죽하면 여기까지 와서 진료 보겠어? 동네에서 못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겠지.. 저 사람들 상황이 어떤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남편의 그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괜스레 더 빈정상한 나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암은 아니잖아..."




검사지가 발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남편과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남편이 서류봉투에서 검사지를 꺼내보니 6장 정도 되는 종이에 영어가 빈틈없이 적혀있었다. 남편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눈에 불을 켜고 글자들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영어에 능통한 남편이라지만 의학 전문용어 앞에서는 까막눈에 불과했다.


한참 동안 검사지를 들여다보던 남편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일단 지하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남편은 식당에서 돈가스를 먹으며 핸드폰으로 조직검사지의 단어들을 찾아갔다.

"아~ 이게 림프 위치를 말하는 거구나... 이건 세포 종류고... 이건... 대망... 아~ 이게 염증이란 단어였네.."

그러다 어느 순간 남편의 중얼거림이 없어졌다. 조용해진 남편을 보니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멈춰있었다.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오빠. 오빠! 왜? 뭔데? 뭐 나왔어? 나 전이됐대? 많이 안 좋아?... 뭐냐고... 아! 왜 그러는데... 뭔데?!"


남편은 잠시 동안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잠시.. 잠깐만.. 잠깐. 다시.. 다시 한번 볼게. 나도 이게.. 내가.. 내 영역이 아니라서. 잠깐만. 이따 얘기해줄게."라고 횡설수설했다. 그런 남편의 표정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당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편은 경직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조직 검사지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나는 남편의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몇 분이 지나 남편은 결과지를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희미하게 웃었다.


"암이 없대."


?

암이 없다고...?


남편은 내게 말했다. 떼어낸 다른 장기들에서 암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자기가 보기에 전이는 없는 것 같다고.




우리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진료실 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여전히 다리를 떨었지만 남편은 전보다 더 여유 있게 말했다.

"왠지 자기는 항암 안 할 것 같아. 물론 암세포 종류랑 분화도까지는 내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전이가 없다고 하면 안 하지 않을까?"


"모르지... 우리 교수님 스타일이 '젊으면 무조건 항암 해야 한다'는 주의랬어... 젊을수록 예방적으로 시킨다고. 처음에 병실에서 만난 00이도 극초기였는데 항암 하고 있었잖아. 물론 걔는 세포가 독한 거긴 했지만... 그리고 교수님 환자들이 그랬어. 선암이면 교수님이 항암 시킬 거라고... 근데 안 했으면 좋겠다. 아 떨린다."


남편은 "아닐 것 같은데..."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나는 계속 "떨린다... 떨린다..."라는 말을 무한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였다.

나보다 먼저 진료실을 들어간 암환우의 남편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우리가 그를 보자 그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 와이프는 항암 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아~~..."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도 내 앞날을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유감이네요, 힘내세요, 잘 될 거예요...'

나도 조만간 항암을 받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위로는 입 밖에 나오지도 않았다.


나와 남편이 머뭇거리는 사이 그의 부인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씩씩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왔다.

나는 그녀에게 "언니~ 들었어요. 항암 한다고."라고 말했고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눈치챈 건지 그녀가 먼저 내게 말했다.

"괜찮아! 림프에 전이가 있는데 항암이랑 방사선 하면 괜찮아질 거래. 기수는 1기 b더라... 그리고 항암은 약하게 할 것 같아. 하면 되지 뭐!"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행운을 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항암을 한다는 말은 내게 다소 충격이었다. 우리는 한 달 전에 수술을 받았고, 결과를 한참 후에나 들어야 했다. 그것은 우리가 급한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어쩌면 항암을 안 할 거라는 기대가 더 컸다. 그랬는데... 그녀가 항암이라니...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남편과 나는 그들이 떠난 후 자리에 앉아 다시 차례를 기다렸다. 점점 얼굴이 하얘지는 나를 보며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와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저 언니 봐봐. 엄청 씩씩하게 나오시잖아. 그게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거야. 다 니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그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닥치라고..'




"일하나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진료실에 들어가서 나는 교수님 앞에, 남편은 한 발자국 떨어진 보호자 의자에 앉았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짧은 인사만 했을 뿐 별 말이 없었다. 떨렸다. 너무 떨렸다. 전이가 되지 않았다는 조직검사지를 손에 들고 있음에도 사지가 떨렸다. 너무 떨어 치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교수님은 내 수술 결과를 모니터로 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다. 진료실 안에 있는 네다섯 명의 의료진들도, 교수님도, 남편과 나도 숨은 쉬고 있는 건지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결과가 빨리 나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교수님은 모니터를 보고 또 봤다. 마우스를 아래로 움직이다가 위로 움직이다가... 다시 아래로 움직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랬다. 교수님은 모니터에서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마치 항암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 같았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진료를 본 것이.

진료시간은 이미 수 분이 넘어가고 있었고 교수님은 마우스를 계속 움직이며 몇 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추 치료는 안 해도 되겠네요." 라고 말했다.






자궁경부암 1기b.

병기를 나눌 때 1a, 1b, 1c... 그중에서도 1b1, 1b2, 1b3 등으로 나뉘는데 나는 1기 중반인 1b였다. 그리고 병명은 자궁내막암에서 자궁경부암으로 바뀌어 있었다.

1b 환자들의 항암 확률은 반반이었다... 몇몇 환자들을 만나본 경험으로 보자면 그랬다. 누군가는 항암을 했고 누군가는 하지 않았다. 물론 세포와 분화도의 차이였겠지만 교수의 성향도 무시하지 못했다. 나는...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그건 몇 년 후 알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3개월마다 추적 검사는 꾸준히 해야 한다고. 예방 항암을 하면 좋겠지만 지금 내 몸으로는 득보다 실이 클 거라고, 그러니 면역력을 잘 높이라고.


나는 교수님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말 항암을 하지 않아도 되냐는 질문이라던가.. 앞으로 괜찮겠냐는 질문이라던가.. 재발 가능성에 대해... 아무것도.

행여나 한마디라도 물어본다면 '다시 생각해보니 항암을 해야겠네요.'라는 말을 듣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재빨리 진료실을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비가 오시네~ 이상하게 아산만 오면 비가 와."라는 말을 하며 우산을 남편과 하나씩 나눠 들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암에 관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어쩌면 그 끔찍했던 기억을 이제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나는 병원에 있는 동안 '다행'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병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고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기에.. 다행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의 반대말은 어쩐지 불행 같아서.. 내가 다행이면 누군가는 불행이라는 뜻이 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 날 만큼은 쓰고 싶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그러나 입 밖으로 내기엔 아직도 나는 암환자였다.


대신 하늘에 대고 이야기했다.


"오늘을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