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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08. 2021

너와 나의 새로운 시간

느껴보자. 앞으로의 날들을 위해.

2019년 1월.

아이와 나, 그리고 한 마리의 강아지인형... 이렇게 셋은 미국행 밤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좁디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아이를 눕히는 것도 부족한데 강아지인형까지 앉히려니 영.. 내가 앉을자리가 없다.

그러게 이 인형을 왜 갖고 와가지고!! 잠결에도 아이는 인형을 놓지 않는다.

개인형아... 너는 이제 국제적인 인형이 되겠구나. 심지어 입국심사도 같이 받을 거란다...




떠나기 전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바로 해외여행자보험이 안된다는 것. 이런저런 보험사에 전화를 돌렸지만 다들 암환자는 거부했다. 나는 자궁만 아플 뿐인데 모든 질병보장을 거절당하다니... 암환자에 수술한 지 얼마 안 되어 상해 또한 보장이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상담사는 내게 물었다. "비행기 사고에 의한 사망은 보장되는데... 가입하시겠어요?"라고.


포기했다. 불안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고 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때 한 보험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질병은 안되지만 상해까지는 해드리겠다고. 그 말 한마디가 이리 반가울 줄이야. 평소엔 5분이면 되었던 보험인데 암환자가 되어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그렇게 겨우겨우 보험을 들고서 압박스타킹을 신고 공항으로 향했다. 코끼리 다리가 되지 않으려면 15시간은 족히 하고 있어야 한다. 허벅지 피부가 벌써부터 짓눌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림프절을 떼내고도 이리 빨리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은 행운일 테니 투덜거리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좁고 좁은 이코노미 안... 밤비행기라 아이는 곯아떨어지고, 조금이라도 아이를 편하게 눕히 내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꾸역꾸역 좌석 한 모서리에 걸터앉았지만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예전엔 비행기 안을 돌아다니며 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알겠다. 부족한 림프절 때문에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다리가 붓고 있던 나 또한 주위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비행기 한 바퀴를 돌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처럼...




10시간의 분주했던 비행이 끝나고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 하기까지 3시간 넘게 줄을 섰지만 막상 걱정했던 심사는 굉장히 빨리 지나갔다. 징징대는 조그마한 아이를 안고 보조가방 여러 개를 어깨에 멘, 눈이 퀭해진 나를 본 심사관이 안타까워하며 바로 통과시켜준 덕분이었다.


공항에서 언니네 가족들과 상봉 후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예쁜 마당과 창문이 있는 2층 집.

안으로 들어와 시계를 보니 오후 4시를 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시간, 아이는 어느덧 형을 따라 뒷마당으로 나갔고 나는 언니네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 후 우리는 2층 방으로 올라갔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포근한 이불들이 깔려 있는, 노란색 조명이 은은하게 퍼져있는 방.

그곳에 앉아 짐을 풀고 있자니 무언가 마음이 따뜻했다. 아니... 따뜻하다기보단 그저 안심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암선고를 받았던 한국에서 굉장히 먼~, 아이의 사회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댁행사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 방은 마치 견고하게 지어진 요새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느꼈다. 이제 책임감을 내려놓아도 되겠다고.



다음날 아침 되자 아이들은 내복 차림으로 뒷마당 잔디밭을 달렸다. 나는 따뜻한 햇살을 맞이하기 위해 잔디밭 옆 의자에 앉아 그런 아이들을 지켜봤다. 곧이어 큰 조카가 나오고 아이들은 누나를 따라 커다란 트램펄린 위로 몸을 날렸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따뜻한 햇살, 아무 계획 없는 오늘.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너는 이 곳에서 평온할 수 있단다.'


조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나와 아이는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두어시간을 걸어도 끝이 안 보이는 넓고 넓은 잔디밭, 보트를 탄 사람들이 보이는 시원한 호수,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오리들, 그리고 가끔씩 지나다니는 아이스크림 트럭.

아이는 그 넓은 잔디밭에서 뛰고 또 뛰었다. 워낙 뛰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지만 조금만 뛰어도 사람들과 부딪히는 도심에선 마음껏 뛴 적이 없다. 그래서 미국에서만큼은 실컷 뛰라고 했다. 뛰고 또 뛰고 숨이 차서 본인 스스로 멈출 때까지 마음껏 뛰어보라고.


아이는 매일매일을 뛰었다. 집에서, 공원에서, 형누나가 다니는 학교에서. 나는 그 모습이 정말 좋았다. 신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의 모습과 그런 아이를 걱정 없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삶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살아질 수도 있구나...

마음껏 뛰고 웃는 아이를 보다 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니.. 실컷, 더 많이 느껴보자.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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