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내가 죽으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을까'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음식을 하다가도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는 했다.
나는 이제 괜찮다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한 생각은 가끔씩 나를 휘감았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그런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다.
사실은 생각할 틈이 없었던 거다. 아이를 등원시킨 뒤 바로 화실로 향하고 나면 다른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여기는 어떤 색으로 칠해야 할지, 붓질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머릿속은 너무 바빴다. 매번 그리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고 나면 어느덧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다.
그림이란 게... 그거 하나 참 좋았다. 잡생각 할 틈을 안 준다는 거.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화가가 될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전공할 것도 아닌데 취미로 배우면 되는 거지, 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몇 달 정도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녀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란 게 참 아쉬울 정도로.
화실에서는 공모전에 나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내 키만 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고, 그들이 말하는 작은 그림조차 내 허리까지는 오는듯 싶었다. 그런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경이로웠다. '우와~ 이 분들 정말, 작가구나... 내 앞에 화가들이 있다니...'
그들에 비해 내 그림은 형편없었다. 크기부터가 달랐다. 나는 한 장짜리 A4 크기 종이에 너덜너덜 그림을 그렸고 기교를 부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나를 응원해주며 말했다.
"하나씨. 이런 거 말고 그냥 작품반 들어와서 공모전에 나가봐~ 큰 그림 한번 그리고 나면 실력이 많이 늘어~"
아효~~ 아닙니다. 항상 이렇게 말했다. 제가 뭐라고 큰 그림을...
정말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저 정신수양만 잘 되면 만족한다고.
그런데 어느 날 원장님이 내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졌다.
"아이 사진 한번 가지고 와봐요. 엄마니까 아이 그림 그려놓으면 뿌듯하지 않겠어요?"
결국...
욕심이 생겼다.
나는 아이를 꼭 그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뭐 하나라도 남기고 싶었기에 그랬다... '엄마는 항상 너를 생각했단다.'라고 나를 대변해 주는 분신 같은... 그런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남들 아무나 가질 수 있는거 말고 온전히 내 아이를 위한 내 아이만 가질 수 있는 그런 거... 그런 것을 내 마음 다하여 그릴 수 있다면... 또 그걸 아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정말 행운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욕심을 부려 작품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매일 화실로 향했다.
딱히 전과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조금 더 강도 높게, 조금 더 매몰차게, 조금 더 원장님의 채찍질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게 된 것뿐... 그리고 그림의 크기가 조금 더.. 많이 커졌다는 것뿐...
나는 작품반이 된 직후부터 인물화에 몰두했다. 이 사람을 그렸다가 저 사람을 그렸다가... 기본적인 이론이나 실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나 때문에 원장님은 인체의 해부학까지 설명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알아듣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고 원장님과 나의 고된 시간은 꽤 오래 지속됐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느 때보다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근육의 움직임과 눈썹의 방향, 코의 실룩거림, 묘하게 차이나는 눈두덩이의 주름들...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자니 '눈썹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이럴 땐 근육이 이쪽으로 올라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새삼스러웠다. 내가 아이의 얼굴을 이리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아이의 소리는 많이 들어도 얼굴의 미세한 변화까지 본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아이의 얼굴을 그냥 지나쳤다는 아쉬움과 아이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다는 뿌듯함이 엉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간절함이 커져 그림은 점점 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노력과 원장님의 손길이 더해져 그림은 기어이 완성됐다. 두 달 만이었다... 아파서 못 나가고 아이의 방학 때문에 그림이 방치된 적도 있었기에 그것의 완성은 내게 아주 큰 의미였다. 힘들기도 했고...
완성된 그림을 보고 원장님은 아쉬워했다. 조금 더 신경 써서 했더라면 제대로 나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무리라는 것을 아는 원장님은 이내 "첫 작품 치고는 정말 잘했어요!"라는 칭찬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그림을 보며 말했다.
"역시 아이는 엄마가 그려야 해요. 남이 그리면 잘 그릴 수는 있어도 아이가 가진 느낌까지 그릴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아이는 엄마들이 그려야 제일 잘 나와요. 봐봐~ 잘 그렸잖아."
직후 전 세계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기저질환자인 나는 집에 갇혔다. 때문에 화실을 다닌 지 5개월 만에 배움을 멈췄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도 수채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던 그 처음의 떨림을 잊지 않고 있다. 연필을 갖다 댈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던 그 종이의 감촉도.
집에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나 느림보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지만... 혼자 그리는 것이 두려워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내 꿈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