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어떻게 버리나요

읽은 책, 읽을 책, 읽다 만 책

by 사대영역

다이어리를 하루 이틀 열심히 쓰니 사람이 괜스레 진취적인 마음이 듭니다. 새 다이어리에 지금 당장 생각할 것들, 해내야 될 것들, 하려다가 놓친 것들,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려고 했던 것들을 쭉 적었습니다. 그리고 1회성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들과, 프로젝트로 장기간 진행해야 하는 일로 분류해 봤습니다. 사과잼 만들기, 시댁에서 받은 파 정리하기, 둘째 숏패딩 구입하기, 만다라트 양식 찾아서 작성해 보기, 업무용 다이어리에 월간 스티커 사서 붙이기 같은 것들은 한 번 신경 쓰면 처리할 수 있는 일이지요. 둘째 책 열심히 읽어주기, 애들 수학문제 틀린 것 뽑아서 정리해 두기, 책 필기해서 정리해 두기, 읽던 책 마저 읽기, 애들 영어책 주문하기, 마케팅 공부 이런 것들은 장기적으로 잊지 않고 계속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중복되어 나오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책상정리, 책 정리, 애들 옷 정리. 바로 정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자기만의 방'인데 '물류창고'와 '쓰레기장'인 그 어떤 곳

저에게는 감사하게도 제 방과 제 책상이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재산은 없지만요.) 첫째 어릴 때 새로 이사 간 집에 크기와 모양이 애매한 베란다가 시작이었습니다. 거기에 작은 책상을 하나 두고, 애 재우고 미싱을 돌렸습니다. 바느질이 취미인데 애 다칠까 봐 그걸 못 하게 되니 그게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부채꼴 베란다 짐선반 옆에 둔 미싱책상이 제 유일한 쉴 곳이었습니다.

다른 집으로 이사를 다니면서도 책상을 버릴 수 없으니 짐을 쌓아두는 방에 제 책상도 넣으면 그곳이 곧 제 방이 되었습니다. 그 책상에서 외주작업도 하고, 글도 써보고, 옷도 만들고, 혼자 놀고, 덕질도 하고,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지금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집에선 방이 그래도 방다운 크기여서 이것저것 해볼 의욕이 있었습니다. 벽장이 두 개나 있는 방이라 수납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이사정리라는 게 금방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애매한 짐들이 다 제 방으로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집들이 때마다 받은 휴지들, 애들 베란다에 깔고 남은 플라스틱 데크 상자, 다이소에서 사 온 각종 집수리 도구들. 그중에 가장 바닥에 많이 깔려 있는 것은 애들 옷과 책입니다.


옷과 책

일단 옷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이들 옷을 정리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애들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헌 옷이 끝없이 나옵니다. 철철이 잘 정리하면 좋겠지만 자매를 키우기에 첫째가 입고 둘째가 입어야 끝이 납니다. 게다가 요샌 옷이 넘쳐나는 시절이라 여기저기서 얻는 중고 옷들도 많아요. 그게 다시 첫째가 입을 수도 있는 옷, 둘째가 입을 수도 있는 옷, 낡았지만 버리면 안 된대서 다시 찾을 수도 있는 옷, 안 입는다고 하는데 아까워서 못 버리는 옷까지 참 다양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걸 버리든지 팔든지 하려면 어쨌든 마음 결정하고 처분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 중간 정거장 역할을 하는 바구니가 제 책상 바로 등 뒤에 있습니다. 물론 바구니를 넘쳐나 바닥에도 깔려 있지요.

그러나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짐은 바로 책입니다. 이것도 옷과 원리는 비슷합니다. 첫째가 잘 읽어서 둘째도 시기만 되면 읽을 것 같은 책. 첫째는 안 좋아했지만 둘째는 좋아할 것 같은 책. 애 어릴 때 추억이 있어서 못 버리는 책. 첫째가 열심히 푼 문제집. 둘째 영어 읽기 할 때 필요한 교재들. 거기에 제 책은 더 점입가경입니다. 제 책이라고 별다르겠어요? 읽은 책, 읽을 책, 읽다 만 책들이 또 빼곡하지요. 거실 두 벽을 책장으로 채우고 거기에서 당장의 필요에 못 미쳐 거실에 있을 자격을 잃은 책들이 제 방에 박스로 더미로 폭탄처럼 쌓여있습니다. 처녀 적 있던 것들은 친정 이사 갈 때 열 박스를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고 네 박스를 버리고도 아직 남아있고, 결혼해서 읽던 책들도 있지요. 출판인들은 안부인사를 책으로 주고받기에 그렇게 받은 책들도 많습니다. 소중히 한다고 처녀 적에 장서인을 찍어서 보관한 책들도 있고요.


왜 정리가 안 되는 걸까

오늘 하루에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목표를 잘게 쪼개어하면 된다고 해서, 첫 스텝은 중고책 팔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방에 몇 번이나 들어가 서성여도 마음이 먹어지질 않습니다. 답답한 방을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지나면 TV에 나오는 쓰레기장 같은 방이 될 것 같습니다. 거실 한쪽 벽을 사진으로 찍으면 당장 오늘의 집이나 인스타에 올려도 될 지경인데, 제 방은 시사 프로에 나오게 생겼습니다. 애들한테 책상정리하라고 잔소리하기 민망할 정도로 제 책상도 엉망입니다. 눈을 질끈 감고 제 방에서 도망 나옵니다.

책을 정리하려고 마음속으로 가늠하다 보면 오히려 필요한 책 사고 싶은 책만 더 생깁니다. 책 버리려다가 당근 봤더니 애 영어책 필요한 게 갑자기 보여서 사 갖고 오히려 늘어난 적도 많습니다. 책을 버리는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도무지 시작이 되질 않습니다. 다이어리에 일정과 시간을 정해두었지만 계속 내일로 밀립니다. 이건 정리할 시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저렇게 책에 집착하는 것치고 저는 독서량이 많지 않습니다. 애들 책 포함해서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해서 읽은 책은 올해는 20권이나 될까...? 그것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출판 언저리에 일하고 살면서 자꾸 독서량이 준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오히려 애 어릴 때는 정말 책을 많이 읽었는데 말이지요. 독서이력을 봐도 교양이 별로 없습니다. 읽은 고전 명작도 많지 않고요. 나는 대체 왜 책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 이 물음을 해결해야 정리가 될 것 같다는 핑계로 중고책 안 팔고 앉아서 글을 써봅니다.


불안을 잠재우는 토템

어느 웹툰이었나...? 야채는 자취생 냉장고의 토템 같은 거라는 농담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먹지는 않지만 건강을 위해 뭐라도 하고 있다는 위안으로 구입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썩으면 버리고 새로 사서 넣게 된다는 이야기에 빵 터져 웃으며 무척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냥 제 머리에 담지 않아도 책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그 내용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열심히 읽었더라도 좀 지나면 어떤 책에서 설파하는 지식이나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되잖아요. 책장을 싸악 둘러보며 제목을 읽노라면 이게 이 내용이었지 아 그랬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기도 하니까요. 다시 꺼내 읽을 시간이 없을 뿐이지 저기 꽂혀 있으니까요. 책만 있다면 좀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나중에' '언젠가' 다시 읽으면 되리라는 안도감도 드는 것 같습니다. 불안을 해소하려고 물건을 소유한다는 정리 책에서 읽은 말이 딱 제게 적용되네요.

지금 쓰면서 생각해 낸 변명은 이렇습니다. 변해가는 제가 두려웠던 것 같아요.(물론 원래는 정리를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재 몸담는 분야가 바뀌면 기존의 것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저는 평생 뭐를 집중적으로 전문가가 된 적이 없고 이것저것 계속 옆으로 옮겨 다니며 공부를 하고 일을 했어요. 그때 그 이전의 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게 되더라고요. 내가 그 분야에 몸담았다는 걸 증명하는 수단은 손에 남은 책뿐이었습니다. 출판계에서 일하며 예전 분야가 다시 필요할 때 믿을 곳도 책뿐이었고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지내면서 기존에 내가 했던 것을 다 잊어버릴까 봐 친정에 가면 책을 한 권씩 갖고 왔습니다. 육아서를 전공서처럼 읽던 몇 년간 쌓인 책들도 다 기억할 리 없기에, 필요하면 꺼내서 보려고, 한번 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또 처분하지 못했습니다. 이걸 버리면, 여기서 얘기한 내용들을 다 잊어버리고 저는 다시 읽기 전의 저로 돌아갈 테니까요. 책들은 제 불안을 잠재우는 토템이었습니다.


불안을 키우는 환경

하지만 그 토템들이 모여 너무 정신없는 환경이 되니, 다른 불안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정리 못하는 나를 배우면 어쩌지. 책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에게 ADHD를 부르는 건 아닐까. 집중하지 못하는 환경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악영향을 미치면 어쩌지. 이런 불안들이 제 마음에 스멀스멀 자라고 있습니다.

해야지 해야지 하는 마음들은 스트레스를 부릅니다. 제 방에 책이 쌓이게 된 계기도 애들 책장을 정리하다가 생긴 일이니 제 방이 이 괴로움의 최종 정착지인 것은 맞는 듯합니다.

거실 한쪽 벽 외에는 모든 공간이 더부룩해 보입니다. 정체되고 고인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미니멀 대체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마음 수양이 많이 필요한가 봅니다. 깨끗한 집을 향한 욕망은 불가능한 걸까요.

이제 겨울방학에는 재택근무를 해야 하기에 어떻게든 저 방을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수납장을 사서 속에 넣는 것 말고, 있는 물건을 어떻게든 비워내려고 결심해 봅니다. 일단 책들은 한 권씩 읽고 내용을 좀 요약 정리해 두면 좀 마음이 편하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독서록을 그래서 쓰는구나 깨닫습니다.

아휴. 아주 긴 프로젝트가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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