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이어리 뭐 살 건데?

연말연시엔 다이어리가 제철이지

by 사대영역

P 전업주부의 기록이란

그동안 통 글을 못 썼습니다.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여러 사정들로 마음이 스산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절망했고 게임에 빠져 도파민과 소액결제와 시간과 체력을 태웠고, 어디다 말하기 힘든 속사정들로 속을 끓였고, 이제야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와 조금 나아졌습니다. 이제야 글자를 적어볼 마음이 드네요.

흔히 말하는 MBTI로 저는 J가 되고 싶은 P입니다. 계획적인 모습들이 너무 멋져 보이지만 늘 제 선택과 움직임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지요. 제 다이어리는 명확하고 촘촘한 계획은 없습니다. 대신 하루에 할 일들을 써두고 오늘 하거나 내일로 미루거나 정도로 써두는 것이 저의 최선입니다. 계획적인 분들에겐 변명이겠지만 저에겐 이게 최선입니다. ㅎㅎ

일을 할 땐 업무용 다이어리를 썼고 업무에선 제법 J처럼 굴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서류도 착착 아카이빙 해두고 내가 자리를 비워도 다른 사람에게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두고요. 업무용 다이어리는 회사 일만 적으니 내용이 분명하고 쉬웠지요.

그러나 아이를 낳고 집에 있으며 스케줄의 무엇하나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아예 놓고 지내게 되더라고요. 모든 일정이래 봤자 시댁 경조사는 신랑이 알려주고, 친정 경조사는 엄마가 알려주고, 아이들 예방접종 스케줄은 병원에서 문자가 오니 거기 맡겨버리고 자연인 그대로 지냈습니다. 어랏. 쓰다가 깨달았는데 그때도 다이어리를 쓰려고 나름 노력은 했었네요. 수유일지도 쓰고 이유식 계획도 짜고... 물론 제 맘대로 된 건 단 하나도 없지만요... 한마디로 흐지부지했다는 거지요. ㅎㅎ


한 달짜리 스터디 플래너의 힘

암튼 그렇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날을 살던 중, 마음이 어려워 상담을 좀 받았고 상담 후 제가 메타인지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메타인지 자기 이해 등을 찾아보다가 김익한 교수님이 하시는 유튜브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의 유튜브들도 봤었는데... 몇 년 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무튼 제 기억에 남았던 말은 나중에 보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기억하게 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사건들을 머릿속에 이해하여 정리할 수 있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촘촘히 남아있으면 자기에 대해 잘 알게 되고 그것이 자존감과 메타인지의 바탕이 된다는 말이었어요. 너무 멋지지 않나요.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 늘 멋졌지만 전 안되더군요. 평생 몇 장 찌끄리다 만 다이어리가 얼마나 많던지요. 쓰려고 해도 잘 안되고,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제 최후의 노력은 한 달짜리 스터디 플래너였습니다. 딱 한 달만 써보자. 진짜 딱 한 달만 일상의 찌끄래기까지 사건들을 기록하자.

애 아이스크림 사준 것. 점심에 해먹인 것 저녁에 해먹인 것. 놀이터에서 버틴 것. 환불받을 수 있는지 전화통화한 것. 둘째 소아과 간 것. 약국에서 약만 사야 하는 데 하도 졸라서 비타민도 사준 것. 빨래한 것. 주말에 있을 시댁 행사 대비해 무슨 음식 할지 계획하기. 학원비 낼 일정. 애가 읽은 책 기록하기.

시시해 보이는 것들을 다 적어보니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줄 알았던 제 주부로서의 일상이 대단해 보이더군요. 내가 단순히 돈 안 벌고 집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애 키우느라 내 커리어를 희생하고 집에서 썩는 사람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남편 월급)을 극한의 효율로 사용하고 가족구성원의 감정과 건강과 성장의 케어를 담당하며 시간 및 금전 자원의 분배와 사용을 총괄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더란 깨달음도 다이어리 덕분에 얻은 것입니다.


올해는 플래너 뭐 사지?

한 달짜리를 완주하고 100일짜리 플래너를 몇 권 쓰다가 반 년짜리 플래너로 넘어갔고, 너무 무거운 듯해 다시 100일짜리에 정착했습니다. 그동안 모트모트의 플래너를 쭉 써왔어요. 이거 진짜 좋습니다. 이미 써보신 분들도 많겠지만요.

그런데 이제는 좀 더 긴 안목의 플랜을 세워보고 싶더라고요. 이제는 1년짜리 다이어리, 위클리 플랜, 이것들이 한 번에 갖고 다녀도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의 다이어리를 찾고 있습니다.

김익한 교수님은 하루에 6쪽씩 쓰는 걸 권하시고 또 이룸다이어리라는 것도 출시되어 있는데 제가 그 시스템을 모방해 며칠 써본 결과 데일리의 매일 기록도 분명 필요한데 매일 그렇게까지 쓸 짬은 잘 나지 않더군요. 게다가 매일 다이어리를 못쓰는 날도 있는데 매일 쪽수가 너무 많이 할당되어 있고 그걸 한 달에 한 번씩 사야 한다니 솔직히 자신은 없더라고요... 그래도 다달이 계획을 세우는 부분이 너무 궁금해 한 권 사봤습니다. 배송을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의 계획은 연간과 위클리가 들어있는 다이어리와 데일리 기록을 할 노트 투트랙으로 가면서 최대한 기록 분량을 늘려보는 구상입니다. 그냥 얇은 먼슬리+모트모트 플래너로 갈까? 제대로 된 위클리 다이어리에 데일리 기록을 따로 할까? 그러면 플랜 쓰는 곳만 좁아지고 데일리엔 아무것도 안 쓰게 되어 오히려 기록량이 줄지 않을까? 6공 다이어리에 내지를 다 사가지구 이것저것 맘대로 끼워서 써볼까? 매일 쓸 곳이 부족하면 어쩌지? 그 분량을 다 못 채우고 빈 채로 지나가는 날도 많은데... 그럼 그건 그거대로 마음이 불편할 텐데... 반년 전에 쓴 데일리 기록까지 다 들고 다닐 필요가 있나? 그럼 어떡하지... 어떡하지...


됐고, 일단 쓰기나 해

김익한 교수님이 <성공예감>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체계를 고민하지 말고 일단 그냥 쓰라고. 6공 다이어리와 속지를 사서 펀치로 뚫어서 뭘 끼우고 그걸 어쩌고 구상하던 저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었습니다 ㅋㅋ 뭘 하라고 하면 왜 저는 그런 머리부터 굴리고 있는 걸까요. 지금도 이제 이 글을 쓰고 나면 다이어리 사러 나가려고 하는데, 아직도 마음을 못 정했습니다.


"경험 기록은 크게 일상 기록과 일 기록으로 나뉜다. 특히 일상 기록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일상을 기록하라고 하면 뭔가 이벤트가 있거나 특별한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별일 없는 나날의 연속이다. 그런 날들을 그냥 흘려보내면서 산다면 우리 내면은 텅 비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 ... 당신은 신기루 속에서 살고 싶은가? 미디어와 SNS에 현혹되어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가? 지금부터라도 당신의 일상을 기록하라. 기록을 통해 일상을 정돈하고 삶을 체계적으로 꾸려 나가길 바란다. 일상의 사소한 것을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목표를 중심으로 나는 매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한다. 이 계획에는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 성장과 성취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어제와 그제에 있었던 일부터 오늘과 미래에 이루어질 일까지 하나의 연속선상에 존재하게끔 기록한다. 그 연속선상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들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계획의 본질이다.

사는 동안 이것만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있는가? 당신의 다짐은 미래의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제나 꿈을 현재로 가져와야 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 일과 연관된 것을 의식적으로 하루 계획에 끼워 넣으라는 것이다. 30분도 좋고 10분도 좋으니 조금씩 일과에 넣어 보자.

현재의 직업이나 자산, 실력과 상관없이 꿈과 관련된 행동을 3년 동안 매일 하나씩 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매일 아침 꿈과 관련된 일을 다이어리에 쓴 다음 그것을 실행하고, 실행한 과정을 기록하고, 하루가 끝날 때 상기함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꿈에 다가가는 것이다." (김익한, <거인의 노트> 발췌)


하고 싶던 것들, 하고 싶은 것들, 해야 하는 것들, 고민해야 할 것들.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얼른 써야 합니다. 더 앓아눕기 전에, 더 잊어버리기 전에, 다이어리 사러 갑니다. 그전엔 집에 노트가 없어서 못 쓴 거냐고요? 쉿, 그건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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