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불매
일제 불매에 대해 유독 히스테릭한 반응들이 많아요.
제 조부모님, 부모님 역시 일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에요.
건강을 중시하시는 부모님은 후쿠시마 이후 일본 식자재를 멀리하시긴 하지만요.
팔순 넘으신 조부모님들이야 뭐 그렇다 치고, 아직 앞길이 창창하신 부모님들께는 꾸준히 지치지 않고 제 의견을 공유하고 있어요. 그게 평화와 민족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일상에서 최소한 이런 염치와 역사관을 갖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기도 하고요.
한국은 다른 전쟁 피해국과 여러 면에서 달라요. 제 관점에서 가장 큰 점은 민족반역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끌어 안은 것이에요. 덕분에 일본 추종하는 많은 분들이 살아 남았죠. 일부는 본인을 끌어안은 모국에 군국주의 일본신민의 관점에서 계속 저주를 퍼붓고 있지만 아마 대부분은 잘 융화되어 살면서 조국과 민족 앞에 떳떳한 자손들을 키워냈겠죠. 저를 사랑으로 키워 주신 조부모님들도 아마 친일파 출신일거에요. 저희 할머니는 아직도 놀라거나 정신이 없을 땐 무의식 중에 일본말이 튀어 나온대요.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라 대한민국 역사 교육을 받고 자란 저와는 가치관, 역사관이 현격히 다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어떤 아이가 커서 나중에 얼마나 큰 인물이 될지 모른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아이들은 어렵게 대하셨어요. 아마 역변의 역사 속에서 몰인정한 사람들이 늙어서 본인이 뿌린 악행의 대가를 치루는 것을 많이 보셨나봐요. 하지만 일본인으로 살았던 과거 때문인지 일본을 비판하는 소리를 은근히 싫어하셨죠.
제 친구 중에 오하이오에서 3대째 살고, 본인은 엄청 똑똑해서 엘리트 코스 밟고 있는 유태계 미국인 엔지니어가 있어요. 학교 다닐 때 그 아이 포함 여럿이서 큰 차를 렌트해 이웃 주로 놀러갈 계획을 세우는데, 그 아이가 절대 독일차는 빌리면 안된다는 거에요. 다른 나라 출신 친구가 농담인 줄 알고 히틀러 땜에 그렇냐니까 그 친구가 평소 답지 않은 진지한 표정으로 당연하다고, 자기 유태인 친구들은 다 조금이라고 독일에 도움이 될 일은 결단코 안한다는 거에요. 심지어 자기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독일제를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대요. 이게 정말 어려운게, 독일이 여러 산업군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리는 분야가 많고, 기계와 과학을 좋아하는 이 친구로서는 정말 피하기 어려웠을 거에요. 다른 친구가 그럼 너 aa랑 bb에 필요한 cc 제조업체로 dd회사나 ee회사 말고 다른 대안이 있냐니까 엄청 구린 미국 회사 이름을 대면서 자기는 모든 방면에서 독일 대체제를 알고 있고, 굳이 독일제를 사야하면 아예 그 영역은 포기한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너무 부끄러운거에요. 저는 아마 정황상 친일파 후손일 듯하지만 역사 교육을 제대로 받은 덕에 웬만하면 일제를 불매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고 그 것만으로 떳떳하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는 3대째 미국 국적인데다 일본에 비해 비교 불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꾸준히 해 온 독일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있잖아요. 이 아이는 물론 성숙해서, 독일이 지금은 개과천선했으니 너희가 독일제 쓰는 것은 전혀 상관 없다고, 단 자기는 학살피해자들을 생각해서 앞으로도 절대 독일제는 피할거라요. 그 친구가 엄청 짠돌이에다 애인 없는 20대 초반부터 자기 미래 아이들을 위해 저축하는 전형적인 유태인이거든요. 그런데 독일제를 피하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많은 분들이 일제 선택은 개인의 자유 영역이라는데 맞아요. 단 개인의 자유 영역을 어떻게 꾸리느냐에 따라 개인이 유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달라지죠. 굳이 대체제가 있는데 일제를 택하신 분들은 잠깐이면 배울 수 있는 한국 역사를 모르거나 한국계로서의 바른 정체성을 갖지 않는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든 어려움이 생기면 동료나 친구를 배신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 영역이라 생각하겠죠. 저에게 일제 불매는 하나의 지표입니다. 개인 가치관, 공동체 의식, 비젼 등을 엿볼 수 있는 지표요. 일제 불매가 짜증난다시는 분들, 게임에서 비열하게 속임수를 쓴 사람들이랑 취향이 잘 맞는다며 그 사람이 치팅한 얘기 꺼내지 말라고 화내는 격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