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너를 사랑하다 못해
대학시절 시내에 있는 펍에 곧잘 가곤 했다. 주말에 그곳은 특히나 외국인으로 가득 찼는데 대구 토박이 친구는 “다 미군들일 거야~”라고 말했다. 촌에서 올라온 나는 ‘도시에는 다 미군이 있나..’라고 생각했다.
친구와 여기저기 다니며 그날도 곱창을 먹으러 안지랑엘 갔던지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한창 대구의 모든 곳이 궁금해 지나는 풍경에도 눈이 반짝하던 시절, 버스 창 밖을 가리키며 “저기는 뭐야?” 하고 물었다.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을 커다란 문이 잠겨있고 주변은 높은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친구는 “저기 미군부대, 캠프워커야.”라고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겨울 봉덕동 맛골목의 전선줄에 달린 멋진 불빛들을 보며 지나가거나 그 동네 유명한 기사식당에 저렴하게 밥을 먹으러 갈 때면 지나치곤 했다.
9년이 지나 대봉동에 이사를 왔고 새 동네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재미로 사는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동네 이천동까지 접수했다. 타이밍이 알맞게 대구야경투어 코스를 짜야하기도 했다. 어느 저녁 이천동으로의 산책에서 ‘캠프헨리’를 발견하고는 그간의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찾아보고는 ‘촌 애는 바보였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큰 도시에 미군부대가 모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반가움인지 뭔지 모를 캠프헨리가 그때의 그 캠프워커도 아니었다.
한국 주둔 미군부대는 제일 처음 주둔했던 거점지 용산의 대부분이 현재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했고 본부가 자리하고 있다. 그 밖에도 작은 부대들과 공군기지들이 곳곳에 있기도 하지만 크게는 여섯 개의 배치지역으로 나뉜다.(의정부, 용산, 평택, 대구, 오산, 군산) 그런 대구에 있는 4개의 구역 중에서도 이천동에 있는 캠프헨리는 주한미군 대구기지사령부 역할로서 중요한 곳, 대학시절 보았던 캠프워커는 지금은 부지가 대구시에 반환이 된 헬기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해외파병 부대의 부대명 앞에 붙는 캠프(Camp) 뒤에는 대부분 그러하듯 전사자의 이름을 기려서 붙인다.
위성지도에도 보이지 않으며 실제로도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변의 건물들을 낮게 지어 남구 일부분은 고층건물이 없는 것도 촌에서 온 애는 재미있다. 가로등이 훤히 켜진 미군부대 담장을 호기심 가득 장착하고 따라 걸으니 뜻밖의 풍경과 마주했다.
반가운 마음에 나의 입은 벌어지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나 가볍게 넘어갔을 역사책 가장 앞부분, 각종 시험에서 빗살무늬토기 다음으로 대체로 문제 1번과 2번에서 만날 수 있는 그것, 내 앞에 고인돌이 펼쳐졌다. 이 미군부대 담벼락에. 환한 조명을 뒤로하여 당당하고 고고하고 은은하기까지 하다.
이곳은 한국에서 가장 처음 고인돌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때 발굴된 고인돌이 지금은 경북대학교 박물관 앞에 위치하여 가품을 만들어 둔 것이다. 줄을 지어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불어오는 바람과 길의 끝까지 길게 뻗은 나무, 높은 군부대 담장과 고인돌은 이상하게도 낭만적이었다.
(북방식과 남방식은 초기에 많이 발견된 지역을 따라 붙여진 이름이나 이후 다양하게 출토되었기 때문에 명칭과 상관없다)
괴여있는 돌,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6만 기가 있는데 그중 절반이 한반도에 위치하여 한국을 고인돌왕국이라고도 한다. 3만 기 중 2만 기는 전라남도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단일면적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고인돌의 도시는 화순, 고창, 강화도 등이 있다. 하지만 대구엔 442기가 있는 고창보다도 많은 3천여 기가 있었다 한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였는데 자신들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돌을 이리저리 가져가버렸던 일본인과 우리의 대규모 국토개발, 시가지 확장으로 소중한 문화재가 하나씩 없어져버려 현재 대구엔 100여 기 밖에 남아있지 않다.
미군부대가 주둔하기 전 이 담벼락 안은 일본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인돌을 처음으로 발굴한 것도, 돌을 무분별하게 가져갔던 것도 그들이라,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남구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 100년 전 즈음의 그때로 나를 데려가주는 듯했다.
대구의 첫 수도인 대봉배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군 관사들로 흐르는 물길 밑으로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물 맑은 건들바위 앞에 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릴 생각에 들떠있다. 바위 건너 일본 군부대 옆으로는 영문을 모를 땅 밑으로 큰 돌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 주위를 에워싸고 구경을 한다. 그렇게 세상에서 처음으로 대구에서 고인돌이라는 존재에 의미를 더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인돌과 미군부대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나의 대구는 매력이 도무지 끝이 없다. 언젠가 꼭 피라미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사람들은 사막을 가고 싶은 것이 아닌 인간이 쌓아 올린 불가사의한 피라미드를 보러 이집트를 방문한다. 영국엔 스톤헨지를, 이스터섬에는 모아이석상을, 제주도도 하물며 그만의 돌하르방을 보며 누구나 카메라를 꺼내든다. 대구도 전 세계인이 찾아올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거석문화의 중심지가 되지 못한 것이 많이도, 비통했다.
실제 고인돌은 아니지만, 미군부대 담장과 고인돌의 이상한 만남은 전 세계 이곳밖에 없을 터. 하나씩 새어 나오는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더해진 낭만적인 대구 남구 이천동은 나의 산책코스로는 딱이다. 잃어버린 대구의 보물을 소개할 수 있는 곳으로도 딱이다. 대구야경투어코스로 대구고인돌의 명성과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대구를 소개하기에 알맞은 곳이며 주변의 고미술품거리와 대구수도의 시작인 대봉배수지, 건들바위와 대구천을 설명하기에도 딱이다. 여기다.
그날 밤 꿈에 뉴스에선 내가 바라는 대구가 흘러나온다.
“고인돌의 도시, 대구를 찾는 전 세계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대구는 세계에서 고인돌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지역으로 특히나 선사시대의 모습을 신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도시 전체에서 직접 체험하며 느껴볼 수 있습니다. 대구에 분포되어 있는 공룡발자국과 함께 지질시대와 선사시대를 합친 테마파크가 최근 개장하며 대구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뛰어난 가치가 부여되는 유네스코 역사지구로 등재될 예정이라 전해집니다.”
때론 흔적으로도 지역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다. 지키는 것과 기억하는 것. 비단 문화재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