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바람에 밀려다니듯 우리 역시 태어날 땅을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뉴질랜드에 터를 닦고 살았던 마오리 부족들은 이 땅을 ‘아오테아로아(Aotearoa)’, ‘길고 흰 구름의 땅’이라고 불렀다. 1층으로 된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인 작은 마을에서 바라보면 정말 세상은 대부분이 하늘이고 구름이 이 땅의 거주민 같다. 때론 붓칠을 하듯 강렬하게, 때론 파도를 타듯 유연하게, 구름은 상황에 따라 다른 자세를 취할 줄 아는 능숙한 여행자다. 누군가에게 뉴질랜드는 인생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이건만, 남편의 선택에 따라 수동적으로 따라온 나에게는 머나먼 타지일 뿐이었다. 매일 꿈에는 한국이 나타났고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꿈, 친구들이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꿈을 꾸며 소소한 일상과 익숙한 얼굴들을 그리워했다. 침대에 파묻혀 울면서 우울에 시달리던 시절, 창문 밖 구름을 보며 일기를 쓰는 것이 그나마 나를 일으키는 방법이었다.
초원 위 양 떼처럼 유유히 지나가는 구름들은 내 처지를 상기시켰다. 경주마처럼 자라온 내게 차라리 저기까지 달리라고 한다면 저 산을 오르라고 한다면 그렇게 목적이 분명하면 좋겠건만, 뉴질랜드에서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사방이 탁 트인 아름답고 광활한 땅, 하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고 매일 걸어도 똑같은 초원 같은 삶이었다. 한국에서는 매일 정해둔 목표가 있었다. 공부를 하건 일을 하건 목표를 정해두고 몰입을 하고 그에 따른 성취감과 결과물을 얻었다. 분명한 디데이가 있어서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그만큼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도시에 나가서 뭐라도 배워야 하지 않나, 일하는 감각이 떨어지면 어쩌지’ 하고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고작 뉴질랜드에 온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면서 새로운 곳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못할 만큼 나는 나 자신을 유독 채찍질했다. “목표 지향적으로 사느라 못 보고 못 느꼈던 것들을 누리라고 주어진 시간인지도 몰라.” 초조해하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열심히 일만 할 줄 알았지 하루를 잘 살아내는 방법은 몰랐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터를 잡은 뉴질랜드 헌틀리(Huntly)는 대부분 정원 생활을 했다. 집보다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집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주말이면 이웃들이 밖으로 나와 잔디를 깎았다. 뽑고 잘라내도 얼마나 식물들이 빨리 자라나던지 그 열심에 놀랐다. 몇 주 정원 일을 하지 않으면 잔디가 거칠고 길게 자라나 지저분해지고, 온갖 잡초들이 정원을 뒤덮어 엉망이 됐다. 담벼락 대신 심긴 나무들(Hedge)이 높이 자라나 시야를 막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기 때문에 제때 관리해주지 않으면 빈집처럼 보이기 쉬웠다. 사람들은 땡볕에도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솎아내고 물을 주며 정원을 관리했다. 그곳에 살지 않으면 모를, 보이지 않는 많은 일들이 푸르름 뒤에 숨어 있었다.
우연히 산책을 하다 만난 마가렛 할머니는 마당 위로 떨어진 낙엽들을 긁어모으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하루 일과는 참 단순했다. 정원에서 과일을 따고 채소를 뜯어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보고, 집안팎을 청소하고,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휴가철이라고 여행을 떠나지도 새해가 되었다고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매일 같은 일을 평생 동안 꾸준히 하는 것이 지루할 법도 한데, 할머니는 늘 웃고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운전을 하고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것이, 자신이 돌볼 고양이가 있고 정원을 가꿀 체력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울 때,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자신을 격려할 수 있다면. 매일 어떤 종류의 일이든 생각하기보다 움직이고, 그저 선물로 받은 오늘 하루를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면. 그 똑같은 하루하루가 쌓여서 굳이 세상이 변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이 변하는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구름이야말로 이방인의 운명이다. 잠시도 한 곳에 가만히 머무르지 못하고 바람이 미는 대로 달려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또 자기 인생이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구나 처음 깨달았다. 그것들은 꽤나 중요한 국적, 부모, 형제자매 같은 것이었다. 구름이 자신의 자리를 정할 수 없듯 우리 역시 태어날 땅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살아갈 태도는 선택할 수 있었다. 구름을 보고 뜨거운 태양을 피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느낄 수도, 해를 막아서 우울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내게 주어진 하루도 구름처럼 무채색으로 느껴졌다. 어떤 색을 입힐지는 나의 선택 같았다. 오늘 하루를 내가 받은 재능이라고 생각하자. 이 하루를 내가 가진 전부라고 생각하자. 뚜렷한 목적이 없어도 갈 방향을 몰라도 하루하루 성실히 사는 것을 연습한다면 어느새 행복이 내 옆자리에 있지 않을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떠올리며 비교하기보다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새로운 해가 뜨고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에 충분히 감사하면서.
글/사진 장혜영, 그림 guka(https://www.instagram.com/madeinguka/)
뉴질랜드살이 5년 차인 작가가 뉴질랜드에서의 삶을 담은 뉴스레터 <다정한 시선>을 이메일로 발송하고 있습니다. 위 에세이는 1월 1일(월) 발송한 뉴스레터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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