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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영 Dec 28. 2023

크리스마스에는 고백을

뉴질랜드에서 맞이하는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그림 guka


내가 타지에 있다는 것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때가 바로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남반구에 위치한 뉴질랜드는 한국과 계절이 정반대이고 연말이 될수록 점점 무더워져 한 여름의 절정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된다. 반바지를 입고 있는 산타, 야자수 나무에 걸린 ‘메리 크리스마스’ 현수막, 눈썰매 대신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크리스마스 풍경뿐만 아니라 분위기 또한 한국과는 다른데,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화려하고 특별한 이벤트 느낌에 가깝다면, 뉴질랜드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온 가족이 함께 한 달 전부터 집 안팎을 꾸미고 친척, 친구들과 함께할 저녁 약속을 잡으며 오랜 기간 준비하는, 한국의 설과 같은 큰 명절이다. 신기했던 것은 명절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풍습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집집마다 트리가 다르듯 저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팻(Pat) 할머니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묵직한 서류 파일을 꺼냈는데, 그 안에는 크리스마스 캐럴 악보들이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노래를 알게 될 때마다 한 곡씩 프린트해 모아두고, 12월이 되면 꺼내어 캐럴을 부르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제니(Jenny) 할머니는 길가에 버려진 나무 팔레트를 모아 해마다 독특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만드는 과정은 꽤나 수고스러웠는데, 기존에 박혀있던 못을 뽑아 팔레트를 해체하고, 비슷한 결을 가진 나무끼리 모은다. 만들고 싶은 트리 모양을 구상한 뒤 크기를 재단해 자르고, 못을 박아 고정한다. 그리고 사포로 문질러 매끄럽게 표면을 만들고, 붓으로 염색해(staining) 조금 어두운 색으로 톤을 낮춘다. 그래야 나무에 글씨나 그림을 그릴 때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문구나 그림을 붓으로 칠했는데, 한 번만 칠하면 연하기 때문에 1차로 붓글씨를 쓰고 햇볕에 말리고 2차로 덧칠하고 햇볕에 말리고 3차로 다시 칠하고 말리는 걸 되풀이한 후에야 마무리됐다. 하나의 트리를 완성하는데 꼬박 일주일은 걸렸다. 솔방울을 주워와 은색으로 염색을 하고, 나무 조각에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트리 장식품(ornament)을 만드는 이들도 많았다. 취향에 맞는 장식품들을 사 와서 예쁘게 트리를 꾸밀 줄만 알았지, 이렇게 핸드메이드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었다. 더욱이 나중에 치우고 정리하는 것 또한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트리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애정으로 이루어졌는지 깨닫게 됐다. 



개인을 넘어 모두를 위해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함(Graham)은 헌틀리(Huntly)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옷을 입고 자동차와 자전거 등을 꾸며서 거리를 행진하는 크리스마스 퍼레이드(parade)를 기획했다. 아무런 지원도 누군가 지시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지역 사람들이 함께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일 년 동안 틈틈이 기획하고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행사를 알리고 참여자들을 모아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첫 번째 해에는 먹거리가 부족하다, 참여자가 적다 등등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해에도 행사를 준비했고, 돕는 손길들이 더해져서 헌틀리의 대표 행사가 되었다. 아니타(Anita)는 목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주변 이웃들, 교회 친구들을 초대해 자신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함께 게임을 하고 음식을 나누며 단단한 소속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한 소녀는 홈 파티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공룡 분장을 하고서 나타났다. 무더운 여름날, 비닐로 된 공룡 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해 주려는 마음이 참 예뻤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오늘 내가 죽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난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까? 가족들과 친구들을 찾아가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눈빛으로 말할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될 것이기에, 사랑의 고백을 하며 마지막 시간을 빽빽이 보낼 것이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 날이 아니더라도 고백해도 어색하지 않을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인 듯하다. 아니, 미리 연습할 시간과 주변을 돌아볼 기회를 주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집집마다 보이는 트리 장식과 화려한 불빛으로 멋을 낸 쇼핑몰, 지역 도서관, 대형마트에서부터 아주 작은 동네 가게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놓인 크리스마스 소품들이 우리를 환기시킨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해를 마무리할 준비를 하라고. 저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올 한 해도 수고했다고 서로를 격려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말라고 힘내라고, 맛있는 음식과 선물로 위로한다. 뉴질랜드에서 사랑의 고백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배운 듯하다. 직접 구운 쿠키든 손으로 써 내려간 편지든 함께 보는 영화든 ‘너를 생각하고 있어.’하고 크리스마스에는 고백을 해야겠다. 큰 별을 보고 찾아간 동방박사들처럼 일단 크리스마스에는 찾아가 문을 두드려야 한다.


글/사진 장혜영, 그림 guka(https://www.instagram.com/madeinguka/)




뉴질랜드살이 5년 차인 작가가 뉴질랜드에서의 삶을 담은 뉴스레터 <다정한 시선>을 이메일로 발송하고 있습니다. 위 에세이는 12월 25일(월) 발송한 뉴스레터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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