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유산과 임신과 출산, 전신마취 수술까지…
뉴질랜드에 와서 인생의 대소사를 다 겪었다. 두 번의 유산과 임신과 출산, 전신마취 수술까지… 돈이나 명예보다 건강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유산을 경험하면서 큰 아픔을 겪었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참 기뻐했었구나 뒤늦게 알았다. 아플 때는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쉬고 싶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첫 번째 유산과 임신을 했을 시절에는 그 집이 한국이었고, 가족들 품에서 쉬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 서러웠다. 특히나 병원에서의 의사소통은 스트레스였고, 모국어를 쓰면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 머무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식인지 절절이 느꼈다. ‘대(大)’도 ‘중(中)’도 아닌 일상의 ‘소(小)’사 가운데에도 나는 긴장했고 눈물이 많아졌다. 안약 한 상자를 샀는데 유통기한이 며칠 안 남은 약을 받아서 교환해야 할 때, 맥도날드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지 않아 점원에게 말했는데도 만들고 있다는 말만 듣고 20분이 넘게 서서 기다릴 때. 별 것 아닌 일들인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보고 반응을 예상하며 또 뭐라고 대답할지 되뇌어 봐야 했고, 몇 번을 컴플레인해도 일처리를 안 할 때면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며 스스로 위축되고 슬퍼졌다.
인생의 변환점이자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펼치게 되는 출산의 과정을 뉴질랜드에서 오롯이 겪었는데, 이때부터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는 뉴질랜드 집이 진짜 집으로 받아들여졌다. 출산과 육아라는 낯설고 어려운 큰 일을 남편과 함께 겪으며 동지애가 생겼고, 그 과정에서 우리 곁을 지켜준 의료진과 이웃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각별한 마음이 들었다. 첫째 아들 로이를 출산할 때 양수가 터지고 자궁문이 6 cm까지 열려서 아이가 나오길 심호흡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10cm가량의 거대한 자궁근종이 있었기 때문에 의료기기를 몸에 붙이고 상태를 체크하는 의료진이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아기의 심장박동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봐도 나아지지 않아서 응급 제왕 절개 수술에 들어갔다. 의사들이 모이고 하반신 부분 마취에 들어가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한 간호사는 내 옆에 붙어서 계속 설명을 해줬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냐며 제왕 절개 수술을 할 것이고 마취에 들어가는데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면 말하라고 했다. 누르는 느낌은 괜찮은데 날카로운 느낌이 들면 안 된다며, 아프다고 말했더니 모르핀을 투여받았다. 그렇게 바로 수술을 시작해 곧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의료진은 로이를 내 품에 안겨주었고 젖을 찾게 도와줬다. 그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로 눈물이 났다. 가장 가까운 표현은 ‘경이’였다. 옆에 있던 간호사는 손수건을 적셔 내 얼굴을 닦아주며 다 괜찮다고 안도의 말을 해주었다. 낯선 얼굴을 한 영어를 사용하는 의료진들이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심지어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에 좋아하는 노래가 있냐며 틀어주겠다고 묻기도 했다. 찬송가를 부탁했고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음악보다도 나를 배려해 주는 마음씨에 이미 힘을 얻었다.
1박 2일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퇴원을 하자, 아이비(Ivy) 목사님이 만들어준 저녁 식사가 도착해 있었다. 소고기 민스로 만든 불고기 덮밥과 디저트용 쵸코 푸딩이었다. 한국 음식 레시피를 찾아보고 만든듯한 요리를 보며 나를 생각해 준 마음이 고마웠다. 뉴질랜드에서는 무료로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는 대신 병원과 의료진의 부족으로 의학적인 치료만 할 뿐 돌봄(케어)의 목적으로 공공 진료를 받을 수는 없다. 자연분만의 경우 출산 후 당일 퇴원이 일반적이고, 제왕 절개 수술을 받았거나 전신 마취 수술을 했더라도 1박 2일을 머물 뿐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짧은 입원 기간 동안 병실에 찾아오지 않고 퇴원을 한 이후 따뜻한 식사 혹은 직접 만든 쿠키나 빵을 전해주며 보살펴줬다. 미리 연락을 해서 먹지 못하는 음식이나 알레르기가 있는지 묻고 몇 시쯤 방문하는 것이 좋은지 상의한 후 찾아왔다. 방문했을 때에도 정말 음식만 전해주고 편히 쉬라며 안부의 말만 전한 채 혹은 안부의 말을 적은 편지를 건네주며 최소한의 시간만 머무르고 떠났다. 서양의 문화가 실리를 추구하고 서로 간의 영역을 절대 넘어가지 않아서 오래 살아도 속을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어찌 보면 자신이 무슨 요리를 만들 것인지까지 명확하게 전달해서 편의를 주고, 자세히 물어보지 않아서 선을 지키며 서로를 보호하는 문화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 7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동고동락하며 깨닫는 것은 미리 판단하거나 예상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살아보니 무조건 나쁘고 슬픈 일은 없었다. 어떤 날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위로를 얻기도 하고 도움을 주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타인은 물론 나에 관한 것들도 미리 단정 짓지 말자고, 그냥 살아가 보자고, 오는 사람 막지 말고 알아가 보자고 다짐한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먼 곳에 오고 나서야 주변의 고마움을 알게 된 듯하다.
추신, 한국과 뉴질랜드 의료의 다른 점!
한국과 뉴질랜드 두 곳 모두에서 진료를 받아본 경험으로 두 나라는 확연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 진료를 볼 때 당일 진료가 가능할 만큼 빠르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일주일 전에는 예약을 하고 가야 한다. 그래서 열이 난다든지 감기에 걸렸다든지 작은 병치례는 예약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다 나아서 별 의미가 없다. 집에 상비약을 두고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는다. 또한 전문의를 만나기까지 짧게는 2주, 길게는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편인데, 한국에서는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피부과 등 전문의를 만나러 바로 찾아갈 수 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GP(General Practitioner, 지역 병원에서 만날 수 있는 일반의)를 먼저 만나고 GP가 소견서를 써줘야지만 전문의를 만나는 예약을 잡을 수 있다. 대신 진료를 보러 가면 상세하게 의사가 설명을 해준다. GP의 경우 한 환자당 15분의 진료 시간을 기준으로 예약을 잡기 때문에 궁금한 점이 없어질 때까지 물어볼 수 있다.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받기 전에도 의사는 내가 받게 되는 수술이 어떤 것인지 어려운 의학 용어를 풀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해 줬고, 수술 직전 내가 어떤 수술을 받게 될 예정인지 아느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리고 내가 이해를 하고 있음을 대답을 통해 알게 된 이후에 수술에 들어갔다. 마취에서 깨어난 이후 의사가 찾아와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설명해 줬고, 퇴원을 할 때에는 어떤 진료를 받았는지 그 내용과 상황을 프린트한 종이를 전해줬다.
한국과 또 다르게 느껴졌던 점은 뉴질랜드 병원에서는 응급한 치료만 할 뿐 케어(보살핌)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신마취 수술을 했더라도 1박 2일 동안 머무는 것이 보통이고, 그 1박의 시간 동안 계속 혈압을 체크하고 피검사를 하며 수치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특별한 이상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바로 퇴원 절차를 밟는다. 한국에서는 임신 중 자궁수축이 오거나 출혈이 보이면 쉬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입원 수순을 밟고, 자궁근종 제거 수술의 경우에도 적어도 일주일은 병원에 머물며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보살핀다. 그에 반해 뉴질랜드에서는 무료로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는 대신 병원과 의료진의 부족으로 의학적인 치료만 할 뿐 미용이나 돌봄의 목적으로 공공 진료를 받을 수는 없다.
<다정한 시선>은 매달 마지막주 월요일에 배달되는 뉴스레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정한 시선>은 7년 차 뉴질랜드 시골 살이 중인 작가가 겪은 시선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열심히 일만 할 줄 알았지 삶을 잘 살아낼 줄은 몰랐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려 애쓰며 기록하는 에세이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지난 화 보기가 가능합니다.
https://newzealand.stib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