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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할머니가 생겼다.

나의 친애하는 베티

by 장혜영
2025_다정한시선_2.png 일러스트 guka


“나를 보러 오는 거야? 점심 같이 먹을 수 있니?” 정말 친할머니처럼 설레하며 기뻐하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진다. 베티 할머니는 내가 뉴질랜드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다. 7년 전 뉴질랜드 헌틀리에 정착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할 때, 같이 차 한잔 하는 게 어떠냐며 자신의 집에 초대해 나의 안부에 대해 물어주고, 심심하지 않게 뜨개질을 가르쳐줬다. 진득이 시간을 쏟아야 하는 작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뜨개질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바깥바람을 쐬는 게 좋아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그녀에게 뜨개질을 배웠다. 왕초보인 나와 진도를 맞추기 위해 할머니는 뜨개질 시범을 보여주고 나서, 고양이 코바와 놀아주고 간식을 가져오기도 하면서 가만히 기다려주셨다. 나는 적어도 할머니보다 3배는 속도가 느리면서, 뜨개질만 하지 않고 할머니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물었다. 스위스에서 온 옆집 할머니에게 뜨개질을 배워 손수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10대 시절의 멋쟁이 베티,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던 열정 가득한 20대 시절의 베티, 피아노 치기를 좋아하고 이웃에 관심이 많아서 모임을 주도하던 주부 시절의 베티. 그녀를 알아가는 것이 좋아서 손재주가 없는 나는 뜨개질을 핑계 삼아 한참 수다를 떨다 돌아오곤 했다. 언 2년 전 오클랜드로 이사를 가면서 거리는 멀어졌지만, 고향을 방문하듯 명절날 할머니댁을 방문하듯 그녀의 집에 놀러 가곤 한다.


2020 베티할머니_뜨개질_주름.JPG 뜨개질을 하는 베티 할머니의 모습. 로이의 양말을 짜고 계셨다.
2020 베티할머니_간식주시는1_주름.JPG 베티 할머니가 로이에게 줄 간식을 준비하는 모습. 쌀과자에 버터를 발라서 주셨다.


베티 할머니는 식탁에 점심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글루틴프리 음식밖에 못 드시면서 우리를 위해 빵을 사다 놓고, 직접 야채수프를 끓이고, 가든에서 방울토마토, 오렌지 등을 따서 우리를 대접해 주시고, 떠나갈 때 과일과 직접 만든 잼을 주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또 로이를 위해서 장난감들을 거실 곳곳에 꺼내두셨는데, 자신의 자녀들이 가지고 놀던 70년 된 장난감 자동차들과 클래식한 그림의 동화책들이었다. 한 번은 마땅한 장난감이 없어서 만들었다며 할머니가 끌고 다니시는 손수레에 큰 곰인형을 넣어 로이가 밀면서 놀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렇게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토록 아이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이 더 놀라웠다. 로이에게도 이곳은 친할머니 집처럼 친근한 곳인데, 로이가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태어나고 나서도 줄곧 일주일에 한 번은 찾아왔기 때문이다. 잘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아이와 놀러 다닐 곳도 마땅치 않고 집에 있는 것이 나도 아기도 답답할 때 베티 할머니 집에 놀러 와 수다를 떨고 할머니가 만든 쿠키를 얻어먹고 가곤 했다. 할머니는 로이의 발달 과정에 맞게 몸을 뒤집을 때는 포근한 담요를 바닥에 깔아주셨고, 기어 다닐 때는 거실 곳곳에 장난감을 두어서 찾는 재미가 있게 만들어주셨고, 걸어 다닐 때는 밀면서 놀 수 있는 손수레를 꺼내 두셨다. 요즘은 로이에게 60년은 족히 된 동화책, 동요책을 꺼내서 읽어주신다. 이제는 1년에 세네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하지만 여전히 나와 로이의 생일날이 되면 선물을 챙겨주신다. “너를 잊지 않고 있어. 넌 특별한 사람이야. 나에겐 손자 5명이 있는데, 손녀는 없었어. 넌 나의 유일한 손녀야.” 생일 축하 연락을 받으며 뉴질랜드에 왔기에 만날 수 있었던 인연과 사랑에 감사했다.


2022 아기를 바라보는 베티 할머니와 로이.JPG 할머니는 기어 다니는 로이를 위해 바구니에 장난감, 안전한 생활 도구들을 담아 집안 곳곳에 두셨다. 로이는 바구니를 찾는 재미를 느끼며 그 안에 담긴 물건들을 탐색하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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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기를 바라보는 베티 할머니_로이1.JPG
베티 할머니는 친할머니처럼 로이를 무릎 위에 앉히기를 좋아하셨다. 91살의 나이에 무릎이 아프신데도 로이를 안고 노래를 불러주고 책을 읽어주며, 공을 주고 받으며 놀아주셨다.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야. 얼마 전에는 쥐만 한 웨타(Weta, 뉴질랜드에서 서식하는 손바닥 크기의 메뚜기목 곤충)가 내 손 위에 올라온 거야. 브라이언 도와줘.라고 소리쳤지만 남편이 없으니 혼자 해결해야지.” 할머니는 결혼 60주년을 몇 달 앞두고 남편 브라이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인생의 때마다 새로운 도전의 과제들이 있는데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처음 운전을 배웠을 때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것들 투성이라고 했다.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다는 것이 요즘 삶에서의 시름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러면서 내게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라고 하셨다. “넌 정말 원더풀 한 남편을 가졌잖아. 좋은 남편이라고 꼭 말해줘.” 베티의 충고를 듣고 그날 밤 남편 겨레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베티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대신해 보내주신 선물 같은 사람이다. 그녀를 통해 거대한 비전이 없어도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큰 능력이 있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전화, 요리와 같이 사소한 것들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배운다. 나 역시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해야지, 할머니가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더 많이 귀찮게 물어봐야지 싶어진다.


201904 베티할머니_피아노.jpg 피아노를 치는 베티 할머니. 너머에 할머니의 20대 시절의 사진이 보인다.




<다정한 시선>은 매달 마지막주 월요일에 배달되는 뉴스레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정한 시선>은 7년 차 뉴질랜드 시골 살이 중인 작가가 겪은 시선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열심히 일만 할 줄 알았지 삶을 잘 살아낼 줄은 몰랐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려 애쓰며 기록하는 에세이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지난 화 보기가 가능합니다.

https://newzealand.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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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