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의 「현남오빠에게」는 과거 가스라이팅에 노출됐던 인물의 고백을 담았다. 남자친구 강현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지난 10년간의 연애를 돌이켜보며 그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털어놓는다.
가스라이팅은 연극 '가스등(Gas Light)'에서 비롯된 심리학적 용어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뜻한다.
연극 속 아내는 점차 어두워지는 가스등을 지적하지만, 남편은 이를 알고서도 계속해서 부정한다. 이에 아내는 판단력이 흐려져 남편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남오빠에게」 속 화자는 10년간의 연애 기간 동안 남자친구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한 인물이다. 연애를 하는 동안 화자의 세계에는 오직 남자친구만이 있고, 남자친구는 화자의 교우관계까지 간섭한다. 자신에게 친절한 교수는 변태로 모는가 하면, '널 위해서'라는 껍데기뿐인 이유로 화자의 미래에도 관여한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 화자는 이 모든 것이 가스라이팅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손안에 두고 제 입맛대로 휘둘렀던 연애의 종지부를 찍는 건 화자 그 자신이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청혼은 거절합니다."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조카 대하듯' 받은 청혼과 로맨틱하지 않았던 연애, 그럼에도 아이를 셋은 낳을 거라는 남자친구의 말까지. 화자의 연애는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가스라이팅으로 가득하다. 청혼을 거절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도 '망설이는 줄'로만 아는 강현남의 태도는 헛웃음만 유발할 뿐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이제 강현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위해 새로운 여정을 떠날 일만 남았다. '내 인생이 내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왔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화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소설은 마지막에 다다를 때 더욱 격앙된 톤으로 가득해진다. 더 이상 '강현남의 여자'로 살지 않을 화자는 이제야 비로소 솔직한 마음을 내비칠 수 있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 조금의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라도 강현남이 화자를 찾아올까 봐, 그렇게 데이트 폭력에 노출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남주는 작가노트에서 "느낌표를 찍고 마지막 문단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런데 강현남 씨가 스토킹을 하면 어쩌지? 몰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놓았으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는 여성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연애가 끝나도 여전히 불안감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사실 자체가 슬프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씩 내고 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연습을 해나가고, 남자에 얽매인 인생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아갈 수 있다.
가스라이팅의 실체를 마주한 여성들은 과거에서 벗어날 일만 남았다. 소설 속 화자처럼 자신을 옭아맨 남성을 '개자식'이라 부르며 훨훨 날아가는 것. 「현남오빠에게」는 여성들이 그런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