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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Jan Mar 19. 2021

엄마의 그릇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릇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종종 뜬금없이 그 말을 했다. 대형마트 가판대 위에 유행이 한참 지난 그릇들이 겹겹 쌓여있었다. 엄마는 안경을 눈썹 위로 들어 올리고 유심히 그릇을 살폈다. 개당 가격을 계산하는 듯 눈과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친구네 집에서 봤던 그릇인지 난데없이 보타닉 패턴이 좋아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물었다. "맘에 들어?" 엄마가 답했다 "아니, 그냥 어떤가 보는 거야" 그냥 보는 사람 치고는 너무 진지해서 물어보는 거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엄마의 진지한 쇼핑을 지루하게 지켜보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릇을 내려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엄마가 말했다. "한번 봐본 거야" 확실히 한 번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눈을 흘겼다.


  엄마는 당차고 배포가 큰 여자였다. 소위 말하는 그릇이 큰 여자였다. 엄마의 그릇에는 맛있는 음식과 유쾌한 웃음이 가득했다. 덕분에 늘 사람들이 엄마 주변으로 모였고 어린 나는 그 모습이 그저 신기했다. 크기에 비해 연약하기도 했는데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엄마는 그 안에 무엇이든 담았다. 사소한 기억이나 그때 느꼈던 감정들까지도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돈이었다. 엄마의 마음속에서 돈은 돈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돈은 미움이자 사랑이었고 절망이자 희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돈에 관한 기억과 돈에 관한 감정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리고 마침넘쳐버렸다. 엄마의 마음은 그 속을 알 수 없이 불투명해졌다. 온전한 것인지 깨진 것인지 우그러진 것인지 나도 엄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난 코렐이 제일 좋더라. 가볍고 안 깨져."  엄마의 '좋다'라는 말은 늘 헷갈렸다. '가볍고 안 깨져'가 부연 설명으로 붙었으니 '실용적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좋다는 건 쓸데없지만 이쁘고 비싸지만 갖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어쩐지 다정한 말투로는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참았다. 다만, 할 수만 있다면 가장 깨끗한 물로 그 마음을 씻어 내고 싶었다. 말끔하게 비워낸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다. 빛이 잘 드는 곳에 깨끗이 널어 말린다면 다시 새것처럼 빛나진 않을까 색색의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담을 수 있진 않을까. 말이 서툰 딸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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