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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남재 May 29. 2020

영화보다 무모한, 세 얼간이의 만남

여행이 일으킨 나비효과

히말라야까지 가는 길은 정말로 고되다. 마을버스를 타고 험한 절벽 길을 2일간 가야 하는데 첫날은 해발 3450m의 작은 마을 ‘킬롱’까지 7시간. 다음날에는 14시간을 꼬박 버스에 있어야 한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떨며 출발한 덕에 2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킬롱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의 한 건물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듯 붉은 글씨로 ‘Dormitory’가 새겨진 나무 간판이 덜렁거리고 있다. 입구부터 들어가기 싫게 생긴 빈민굴을 연상시키고, 내부는 다닥다닥 침대가 붙어있어 진드기의 습격을 받았던 악몽의 황금 사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하루 숙박비가 고작 100루피에 불과하다. 거부할 수 없는 저렴한 숙박비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당장에 내 배낭을 침대에 던지고 본다.     


마을을 설렁설렁 걷는 중 영국에서 온 ‘존’과‘루벤’ 그리고 한국말을 하는 중국 친구 ‘쓰레쉬’를 만났다. 이때는 몰랐다. 이들이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최고의 스승이 되리라고는. 첫 만남 후로 7일 동안 존과 루벤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같이 지내면서 이번 여행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들을 함께하게 된다. 모두 20대 중반으로 나이도 비슷해 공감대가 금세 형성되고 친화력이 워낙에 좋은 친구들이라 바로 친해진다. 초면에 중후한 목소리로 재치있는 농담을 하는 모습에 그저 점잖은 영국 신사로만 알았었는데, 완벽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히말라야자락에 위치한 탓에 눈 덮인 봉우리로 겹겹이 둘러싸인 해발 3450m의 고지대 킬롱.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영국에서 온 이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워낙에 시골이라 딱히 할 것도 없고 경치도 예뻐서 맥주 한잔하며 일몰 감상하는 건 어떻냐고 물어보니 갑자기 흥분해서는     


“이봐 J, 우리 저 산 중턱에 가자.”

“응? 갑자기 뭔 소리야?”

“저기 사원에서 맥주 마시면서 해지는 것 보면 멋질 것 같아.”


고산지대에서의 첫날에 산을 타자고 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사원에서 술을 먹자고 하다니, 얘네들도 제정신은 아닌 듯하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맥주 한 병씩 들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논밭을 가로지르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다 마주친 강 위의 흔들다리를 건넌 후 산을 오른다. 아무리 봐도 우리 동네 뒷산보다 완만한 언덕 같은 곳인데 왜 이렇게 숨이 차오를까? 양쪽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오리걸음 하는 것 마냥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같이 무겁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고산증세구나. 그렇게 말 많던 녀석들도 거친 숨만 내뱉을 뿐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맥주는 절대 놓치지 않는 녀석들. 게다가 앉아서 쉬는 틈틈이 대마초를 피우며 맥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있자니 “Manners make a man.”의 멋진 영국 신사 이미지는 이미 내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오히려 오르는 내내 힘들어서 침을 질질 흘리며 서로 욕을 주고받는 동네 친구가 되어 버린 듯하다. 한참을 걷다가 해가 져버려서 결국 사원을 찾는 건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돌담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참 신기하게도 밤 8시가 넘었는데 그리 어둡지가 않다. 저 앞으로 손에 닿을 듯 거대한 눈 봉우리에 반사된 달빛은 시선을 빼앗아가기에 충분하다. 저 은은한 달빛만 따로 떼어내 가져가고 싶을 정도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일까, 이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취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릴 끈질기게 괴롭히는 고산증세 때문일까. 몽롱하고 알딸딸한 기분에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다 됐다.     

“이봐, 존! 루벤! 너무 어둡지 않아?”

“그러게? 돌아가긴 해야겠다. 좀 춥기도 하고.”     


이 어둠 속을 뚫고 산길을 가야 한다니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에게 랜턴 같은 장비가 있을 리 만무해 핸드폰의 바탕화면 기본불빛으로 앞을 비추며 나아간다. 거센 물살 위에 설치되어있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다리 위에서 공포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머나먼 타지에서 이게 뭔 짓거린가 싶다. 고산지대에 적응하며 쉬지는 못할망정 장비도 없이 목숨 걸고 야간산행을 하고 있다니. 생전 처음 고산지대에 발을 디딘 여행자 중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최초이자 마지막일 듯하다.    

  

다리를 넘어 논밭을 가로질러 가고 정말 죄송하게도 남의 집 담장을 넘어서 마당을 통과해 겨우겨우 마을에 도착한다. 셋 다 잔뜩 긴장한 탓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좀 전까지 다들 말 한마디 없이 왔으면서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낄낄대며 웃는다.   

  

“이봐 J, 레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래?”

“그래. 나야 좋지. 너희랑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당연하지. 레는 훨씬 재밌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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