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의 세계(4)

어린이의 정체성

칭다오 어린이 북클럽 1기 가을학기


어느 날 한국 아이가 엄마에게 “난 한국 사람이야, 중국 사람이야?”라고 물어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살아 숨 쉬는 책방 : 순환과 상생, 칭다오 경향 도서관’『인문 매거진 바닥 2020 겨울호』(피서산장) 中에서


피서산장에서 인터뷰 요청을 하셨을 때 부끄럽지만 초심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언제나 초심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기에 이렇게라도 남겨두면 초심을 잃을 때마다 펼쳐 볼 수 있으니 초심을 유지하는 힘이 될 거 같았다. 경향 도서관의 주춧돌은 ‘어린이’와 ‘정체성’이었다. 그 주춧돌을 중심으로 도서관을 운영하다 보니 어느새 칭다오 교민을 품은 도서관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두는 부분은 ‘어린이’와 ‘정체성’이다.


칭다오에 사는 어린이들에게는 공통적인 고민이 하나 있다. 나는 이 고민이 부모님의 고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어린이의 고민이 된다. 그 고민은 바로 ‘정체성’이다. 지난봄에 많은 교민들이 도서관을 방문하셨고, 네 분의 학부모님들께서 각각 상담을 요청하셨다. 나에게 (무리한 요구가 아닌) 대화를 요청하는 분들에게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수락한다. 공통된 고민과 부탁을 받았다. ‘자녀가 너무 오랜 시간 중국 학교에만 다녀서 중국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사용하고, 정체성이 흔들리는 거 같아요.’라는 고민과 ‘북클럽 프로그램이 저희 아이에게 딱 맞는 거 같은데, 2기 만들면 연락 주세요.’라는 부탁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2016년 한글학교를 처음으로 생각하던 시절로 돌아갔다. ‘초심’을 자주 기억하려고 하지만, 세월의 풍파에 의해 퇴적되는 초심을 붙잡기란 쉽지 않다. 초심을 되새기게 해 준 어린이들과 학부모님들에게 감사드린다.

다시 ‘정체성’이란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칭다오 어린이들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너무 많은 언어를 한꺼번에 배우기 때문이다. 어른이 힘들어하는 건 당연히 어린이도 힘들어한다. ‘외국에 나왔으니, 미래를 위해 중국어와 영어는 완벽하게 익혀두면 좋을 거야.’라는 자녀를 위한 좋은 생각이 결국 자녀의 정체성을 흐려지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전 글에서 다룬 ‘어린이의 노동’에 대해 어른들은 조금 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칭다오 어린이들의 공통된 고민은 ‘정체성의 부재’가 아니다. ‘정체성의 과부하’이다. 중국 친구들만큼 중국어를 하길 원하고, 한국 친구들만큼 말하길 바라며, 영어 또한 능숙하게 하길 원하는 부모의 좋은 마음이 정체성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모국어가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는 외국어는 불안정하다. 혹은 외국어가 모국어가 될 수밖에 없다. 이곳이 미국처럼 영주권이 나와서 평생 살 수 있는 곳이면 외국어가 모국어가 되어도 그것을 ‘어린이의 문제’라고까지 생각하진 않겠지만, 칭다오는 영주권이 나오는 곳이 아니다(나오긴 나오지만 영주권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언제까지 있더라도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하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책하실 필요는 없다. 이미 최선을 다하신 거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함께 고민하며, 방향을 조금 수정해 나갈 때라고 생각한다.


아내 역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살며, 같은 문제를 만났다. 이제 13개월이 된 준서 역시 겪게 될 문제이기에 ‘어린이의 정체성’ 문제는 나에게 있어 남들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어린이’와 ‘정체성’ 이 두 가지를 지키는 일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정체성 충돌의 완충작용’을 하는 도서관이 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도서관에는 이미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어린이들도 많다. 어린이라는 세계, 꼭 지켜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욕심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이것만큼은 마음껏 욕심을 내고 싶다. 나와 우리 가정의 일이기도 하니까. 어린이의 고민은 언제나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거 같다.


*이 글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견해를 담았을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되진 않는다. 각자의 교육방식을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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