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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Aug 21. 2022

쉰넷에 사고가 났다. 덕통 사고

내 덕질의 시작


덕통사고.. 갑자기 훅 하고 들어오는 교통사고처럼 어떠한 이유로 인해 팬, 즉 덕후가 되는 것을 이르는 신조어로 덕후 + 교통사고의 합성어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그렇다고 한다. 덕통사고.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 말이다.

어디 이 말 뿐일까?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말도, 태어나서 처음 사용하는 말도 무진장 많아졌다. 소위 '덕질'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덕질'이라는 건 사춘기 여학생들이나 사용하는 말이고, 하는 짓(?)인 줄 알았다. 쉰 중반의 내가 사용하게 될 단어, 하게 될 짓(?) 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사고가 틀림없다. 사고가 맞다. '덕통사고'라는 외에는 적당하게 갖다 붙일 단어가 없다. 누가 만든 말인지 참 적절하다.


나는 노래 잘하고, 끼 많고, 귀엽고, 착하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재능 많은 트로트 가수이며 방송인인 이찬원의 팬이다. 내 큰딸과 동갑인 그를 엄마 같은 마음으로 덕질 중이다


2019년 12월 25일, 주재원이었던 남편을 따라서 인도에서 살다가 귀국한 날이다. 마흔넷부터 쉰넷까지 11년 동안 한국의 문화와도 멀어졌고, 한국의 빠른 발전에도 뒤처져서 살았다.


일 년 내내 한여름인 남인도에서 10년 이상을 살다가 온 나는 한겨울의 매서운 한국 날씨 적응이 너무 힘들었고, 인건비가 싼 인도에서는 거의 접해보지 않았던 무인 키오스크가 손에 익지 않아서 덤벙대기 일쑤였다. 갑자기 귀국한 한국은 추운 날씨 적응도 힘들었고 빠르게 변한 사회 시스템 적응도 쉽지 않았다.


한동안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살던 음이었다. 춥기도 했고, 익숙하지 않은 동네가 불편하기도 했고, 거기에다 코로나 팬더믹까지 덮치고 말았다. 마스크 구하기도 힘들었던 팬더믹 초기의 사회 전반의 공포감은 외출 자체를 어렵게 했. 그러다 보니 집에서 종일 티브이만 켜 놓고 지냈다.


인도에서 한국 티브이는 거의 못 보고 살던 나는 '한국 사람들은 티브이만 보고 살아도 살겠구나' 싶을 정도로 '한국인''한국말'로 하는 화사한 화면의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에 푹 빠져서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게 된 프로그램이 바로 '미스터 트롯'이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은 중독성이 강했고, 내가 경연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실력 있는 출연자들의 노래와 사연은 감동적이었다. 덕분에 3개월 동안 심심하지 않은 한국에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경연이 다 끝나갈 때까지 그저 내가 보는 재미있는 방송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연예인 덕질의 시작이 될 줄은 상상도 했다.


최종 순위 발표가 있던 날, 어김없이 티브이 앞에 앉았다. 대부분이 기존 가수였던 최종 멤버들 가운데 3위를 차지한 출연자가 있었다. 이찬원이라는 대학생 출연자였다. 귀여웠고 정통 트로트를 너무나 잘 불렀지만 트로트가 여전히 귀에 들어오지 않던 나는 그저 '귀엽네, 어린 학생이 목소리가 어쩌면 저럴까? 노래 참 잘하네' 정도로 봐오던 출연자였었다.

우리 가족이 인도에 가기 전에 2년 동안 살았던 그 동네에 그의 집이 있다고 해서 오며 가며 한 번쯤 봤을 수도 있었겠다는 호기심이 생기는 정도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순간에 사고가 나 버렸다. '덕통사고'였다. 3위에 이름이 불려진 이찬원이 수상 소감을 말하는 그 순간이었다. 25살 대학생의 수상소감이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일으켰다.


3개월 동안 집에서 지켜만 본 시청자인 나도 너무 떨리고 긴장되는 시간이었었데 이전까지 1등이었던 어린 대학생 이찬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다가 3위에 호명되마이크 앞에서 하는 말이 너무 대견했다.

수상에 대한 감사 경쟁자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코로나로 어려움에 처한 대구 시민과 사회자 아나운서까지 챙기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착하고 순수한 마음과  깊은 생각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사고는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난다. 전혀 예상 못했던 순간이었다. '쟤 참 괜찮네. 귀엽고 노래도 잘하는 애가 말도 잘하고 생각도 깊네'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다. 응원하고 싶었고 잘되기를 바랐다.


내 나이 쉰넷 살에 평생 처음으로 연예인 덕질이라는 예기치 않았던 길에 들어섰다. 10대 때도, 20대 때도 안 해보던 짓이었다. 친구들이 연예인 책받침을 사 모을 때도, 티브이에서 본 연예인 얘기를 할 때도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나 읽고, 공상이나 하는 일이 더 좋았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사고가 났다. 덕통 사고. 그 사고 덕분에 즐거운 날의 연속이다. 인도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가 주였던 내 블로그에 이찬원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찬원은 매일 글감을 제공해 준다. 재미있는 일이 많았던 인도와는 달리 그날이 그날인 한국에서 자칫 무료할 뻔했던 내 생활의 활력이 되어주고 있다.


노래방에서나 부르던 트로트였지만 이찬원이 부르는 트로트를 매일 듣고 있다. 사람이 좋아지니까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 장르도 좋아지는 마법이 일어났다.

중저음의 굵직한 목소리와 귀여운 외모, 착하고 사교적인 성격, 다양한 재능이 이찬원의 매력이다. 그 매력 때문에 콘서트를 찾게 되고, 티브이에 나오는 그를 놓치지 않고 시청하고 있고, 유튜브도 챙겨서 본다.


덕통사고,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한 번쯤 나면 좋을 사고였다. 새로운 취미가 되었고 알지 못했던 즐거움이 생겼다. 덕질의 세계가 이렇게 재미있는 세계인지 미처 몰랐다.


쉰넷에 나는 사고를 당했다. 덕통사고.

쉰여섯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사고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중이다. 그 후유증의 증상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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