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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빈 Sep 19. 2023

지붕이 없어도 도망가지 않는 플라밍고

프랑스 니스에서

-프랑스 니스에서

 6년 된 친구 김씨와 프랑스 남부 코트 다쥐르 여행을 갔다. 정말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상태로 니스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수영과 여유. 그것 뿐이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고 온 우리도 정말 징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름 계획형인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지만 또 놀랄 일은 아니다. 요즘 인생이 돌아가는 게 딱 이렇기 때문이다. 대비해봤자 놀랄 일들, 막상 닥치지 않는 이상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그런 일들로 가득하다. 빨간 불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건너는 프랑스 사람들처럼 나도 그냥 모든 걸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일부러 계획을 안 짠 건 아니고 그냥 게을렀을 뿐이지만 말이다.


 5박 6일의 니스 여행 숙소는 에어비앤비 딱 한 군데로 정했다. 시내와 너무 멀지도 않고, 하루 10만원 정도로 가격도 적당하며 무엇보다 주인 할머니 인상이 좋아 보이셨다. 후덥지근한 날씨를 뚫고 앤틱한 모래색 건물들을 지나 도착한 숙소는 쨍한 주황색 벽 집이었다. 집 앞에 심은 올리브 나무와 직접 구운 듯한 토분이 집주인의 감각을 예고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 내부는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 직접 모은 건지 그린 건지 모르겠는 미술 작품들이 벽에 적절히 걸려 있었다. 방마다 색깔도 주황색, 빨간색, 녹색 등등 다양하게 알록달록했다. 나도 이렇게 오직 나만의 취향으로 꾸민 집이 있었으면 했다. 오로지 나만이 원하는 색으로 화려하게 색칠한 집. 다락방에 있는 작은 화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식물에 물 주는 게 일과인 삶. 여행이란 내가 겪어보지 못한 남의 인생을 체험하는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숙소를 둘러보고 난 후 본격적으로 해변에 갈 준비를 했다. 파라솔, 튜브, 스노쿨링 고글, 돗자리, 책, 납작복숭아, 물을 챙겨 가장 가까운 해변으로 향했다. 눈부신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해변에는 모래사장이 아닌 돌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많은 사람들이 일정하지 않게 널부러져 있었다. 여자고 남자고 구릿빛 피부를 위해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고 태닝을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들로서는 놀라지 않은 척도 못하고 여실히 컬쳐쇼크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놀라운 시선으로 쳐다보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저 인간에게 있는 신체의 일부임을, 그 어떤 것보다도 당연한 사실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누웠다. 지금까지 모르던 영역의 자유가 펼쳐진 것 같았다. 자유로움이란 무얼까.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원하는 옷을 입는 것이나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는 것? 동양의 여성에겐 허락되지 않던 것들이 이곳에선 자연스럽다. 아니면 해변에 드러누운 여유로운 날들과 어디든 갈 수 있는 젊은 몸뚱아리가 자유를 정의할까?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이 들었지만 진정한 자유로움은 아직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분 좋은 긴장감 때문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금방 지겨워지는 건 왜일까. 언젠가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프랑스 파리의 한 공원에서 플라밍고를 본 적 있다. 선명한 분홍색의 플라밍고들이 그 어떤 철창도 없는 작은 들판에 풀어져 있었다. 그저 영역을 표시하려는 듯한 턱 같은 게 있을 뿐이었다. 플라밍고들은 잠깐 동안의 여유를 즐긴 후 시간이 되자 다시 좁은 철창 속으로 들어갔다. 왜 도망가지 않을까? 턱을 아주 가뿐하게 넘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 긴 다리의 소유주이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플라밍고가 날으려면 적어도 25m의 이륙거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플라밍고를 사육하는 곳에서는 충분한 이륙거리를 확보할 만한 공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 코끼리의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 놓으면 커서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두 이야기에서 플라밍고와 코끼리에 나 자신을 투영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며 정해진 틀 밖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단 한번도 틀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전형적으로 살지 않겠다고 계속해서 다짐하면서도 어느새 난 전형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칙에 반항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나는 그냥 일반적인 인간 그 자체다. 오히려 얌전하고 조용하게 살아온 것 같다. 대학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여전히 꿈을 찾지 못한 채로 졸업을 하면 무얼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웃기지만 내 인생 최대 반항은 '취업 안 되는' 철학과에 진학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자유로움을 동경한다.


 자유란 무엇일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언젠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점점 산으로 가는 침투적 사고에 답하려 애쓰다 자연스럽게 깊은 잠에 들었다. 해변에서 맞이하는 한낮의 꿈은 니스에서 먹은 어떤 젤라또보다도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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